톈진시 서기 장가오리가 상무위원 진입을 위해 화재사건에 대한 철저한 함구령과 중공 관영매체의 취재마저 허락하지 않고 있다.(인터넷 이미지)
톈진시 지현(薊縣) 백화점에서 대형화재가 발생한지 1주일이 지났다. 하지만 대륙 인터넷에는 당국이 사망자수를 제대로 발표할 것을 요구하는 민중들의 요구가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톈진의 분위기는 상당히 긴장된 상태다. 톈진매체는 화제사건과 관련해 단 한 줄도 보도되지 않고 있고 위로는 공산당 간부들로부터 아래로는 피해자 가족, 생존자, 소방관, 공안, 의료인, 장례식장 직원, 기자 및 일반 민중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함구령이 내려졌다.
세간에 이번 함구령은 톈진시 1인자인 시위원회 서기 장가오리(張高麗)가 내렸다고 보고 있다. 그는 톈진 전체 당원간부들에게 대외적으로 발언을 통일해 큰 국면을 중시하고 안정과 조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면서 “그 누구도 이번 화재의 사망자수를 화제로 삼을 수 없고 추도식에 참가하는 것을 불허하며 만일 이를 어길 시 당의 기율과 국법에 따라 처리할 것이다”고 밝혔다고 한다.
장가오리가 진상을 은폐하려는 목적은 물론 자신의 직위를 보존하고 18대에 정치국 상무위원이 되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수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무시하고 이처럼 멋대로 행동하게 됐을까?
장가오리는 1946년 푸젠(福建)에서 출생해 샤먼(廈門)대학을 졸업한 후 석유부 산하의 광둥(廣東) 마오밍석유공사(茂名石油公司)에서 근무했다. 여러 차례 승진을 거친 후 1998년부터 2001년에는 광둥성 부서기 겸 선전시 서기를 겸직했다.
중공의 전직 고위관리에 따르면 장가오리가 선전에 재임하던 기간에 리자청(李嘉誠) 일가와 특수한 관계를 맺었고 이를 기반으로 장쩌민과 연계를 맺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장가오리의 허락 하에 리자청은 아들이 가진 전기통신회사를 이용해 장몐헝(장쩌민의 아들)의 회사 중국왕퉁(中國網通)에 500억 위안을 투자하게 했다. 이 자금의 대부분은 장몐헝이 차지했고 외국으로 빼돌렸다. 이 회사의 적자를 보전하기 위해 장쩌민은 새로 정보산업부를 만들고 국유통신회사를 재편하게 했다. 또한 리자청에게 보답하기 위해 장쩌민은 베이징에서 가장 좋은 지역인 동방광장 사업을 그에게 줬다.
2001년 장쩌민은 자신의 정부(情婦) 황리만(黃麗滿)을 선전시 서기로 만들기 위해 장가오리와 거래를 했다. 자신의 말대로 하면 장가오리를 산둥성에 보내 성서기에 오르는 것과 정치국 진입을 보장하기로 약속한 것이다. 장가오리는 당연히 장쩌민의 말을 따랐다. 그로인해 2001년부터 2002년까지 1년도 채 되지 않는 기간에 장가오리는 산둥성 부서기, 대리성장, 성장으로 고속승진을 했다. 2002년 16대 퇴임을 앞둔 장쩌민은 자신의 심복 우관정(吳官正 당시 산둥성 서기)을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승진시켜 중앙기율위원회 서기를 맡게 했다. 그리고 장가오리가 우관정의 뒤를 이어 산둥성 서기에 임명됐다. 결국 불과 2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장가오리는 산둥의 1인자가 됐고 장쩌민의 은혜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퇴임 후 장쩌민이 태산(泰山)을 참배하려 하자 장가오리는 태산 전역에 봉쇄령을 내리고 타이안(泰安)시 전 직원 및 지난(濟南)의 청장급 이상 간부들을 총동원해 대대적인 환영행사를 열었다. 그는 “장쩌민은 전당, 전군, 전국 인민이 가장 경애하는 위대한 지도자”라고 찬양했고 또한 “장쩌민 만세”를 외쳤다. 한편, 후진타오가 이 말을 들은 후 크게 화를 내며 장가오리를 중국석유화학으로 좌천시킨 후 내부 감찰을 통해 제거하고자 했으나 군권을 장악한 장쩌민 때문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장가오리는 장쩌민을 배경으로 삼아 산둥에서 파룬궁 탄압에 앞장 서는 등 각종 악행을 저지르며 산둥 관리 및 민중들의 반감을 샀다. 이에 산둥성 민중들이 장가오리의 비리를 제보하는 투서가 중앙기율위원회에 산더미처럼 쌓였다.
제보된 내용 중에는 문란한 사생활과 부패한 가족사항 등이 포함돼 있다. 또한 2005년 1월 초에는 산둥성 지난, 칭다오, 옌타이 등 지역의 당정기관 및 인터넷 사이트에 장가오리의 비리에 관한 전단이 뿌려지기도 했다. 또 80여 명의 인민대표 및 당대회 대표들이 연명으로 중앙기율위원회 및 성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에 장가오리를 파면하고 탄핵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2004년에는 제보가 너무 많아 중앙기율위에서 그를 찾아가 상징적으로 일부 부정축재한 물건을 내놓게 했다. 결국 장가오리는 5천 위안에 구입한 별장과 로렉스 시계 2개, 여러 폭의 유럽 유화 등을 내놓았는데 시가로 환산하면 300만 위안에 달한다. 당시 후진타오가 이 자료를 보고 장가오리를 숙청시키려 했다.
하지만 장쩌민의 비호 하에 산둥성에서 무사히 임기를 마친 장가오리는 2007년 베이징에 진입해 중앙정치국 위원이 됐고 더불어 톈진시 서기가 됐다. 톈진에 재임하던 기간에 장가오리는 매체를 엄격하게 통제해 절대 자신에게 부정적인 뉴스가 보도되지 못하게 했다.
한편 2012년 보시라이가 낙마하고 장쩌민을 중심으로 하는 혈채파(血債派-장쩌민 파 중에서 파룬궁 탄압에 적극 가담한 세력)의 세력이 약해지자 장가오리는 후진타오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톈진시 정법계통에 “후진타오 동지를 총서기로 하는 당중앙과 고도의 일치를 유지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반면 저우융캉과 정법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이 없었다. 하지만 5월 말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장쩌민의 ‘3개 대표론’을 옹호하면서 “또한 후진타오 동지를 총서기로 하는 당중앙과 고도의 일치를 유지해야 한다”고 얼렁뚱땅 넘어가려 했다. 장가오리의 이런 변화는 분명 후진타오-원자바오-시진핑 및 저우융캉 등의 격렬한 투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장가오리는 자신에게 불만을 가진 후진타오가 자신의 상무위 진입에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자신의 힘에 의지해 도박을 건 것이다. 중공 지도부의 내분은 곧 있을 베이다이허 회의에서 더욱 격화될 것이다.
확실한 것은 장가오리가 톈진 대화재의 진상이 밖으로 누설되지 못하도록 엄밀히 통제하는 이유는 베이다이허 회의 때문이다. 왜냐하면 뒤가 안전해야 앞에서 승산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쩌민이란 든든한 배경도 사라졌고 저우융캉 세력마저 미약해진 지금 장가오리 혼자 톈진과 전 국민의 분노를 감당해낼 수 있을까? 과연 그의 의도대로 실현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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