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221년 진·초·연·제·한·위·조의 전국칠웅 가운데 산동지역의 제(齊)를 마지막으로 여섯 나라를 멸하고 중원을 통일한 진시황(秦始皇)이 자신의 공이 삼황(三皇)에 버금가고, 덕이 오제(五帝)를 능가한다며 삼황오제에서 ‘황(皇)’자와 ‘제(帝)’자를 따 자신을 ‘황제’라고 처음으로 칭했다. 이후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청이 사라지기까지 무려 2100여 년간 중국은 스스로 황제라고 칭했던 인물을 제외하고 공식적인 역사 자료에 기록된 406명의 황제들에 의해 통치됐다.
이와 같이 진시황이 본받고자 했던 삼황오제 가운데 오제를 열었던 인물이 황제(黃帝)이다. 황제(皇帝)와 달리 황제(黃帝)는 중국 신화상 오방의 신 가운데 중앙을 다스리는 상제(上帝)를 말한다. 오행 가운데 土에 해당하고, 흙을 상징하는 누런색(黃)이며, 얼굴이 네 개여서 사방을 모두 바라볼 수 있었다고 하며 , 중원 각 민족의 선조로 받들고 있어서, 중화사상의 핵심인물이다.
『사기』를 저술한 사마천은 탁월한 역사관을 바탕으로 전해져 내려오던 삼황오제의 이야기를 역사속으로 편입시켰는데, 삼황은 제외하고 황제·전욱·제곡·요·순의 오제부터 기술했다. 황제릉에서 가까운 섬서성 위남시 관할의 한성시가 고향인 사마천은 황제의 천하통일 사업을 기리고자, 중국문화의 서광을 개척한 황제의 이야기부터 서술하고 있다. 사마천은 오제로부터 시작되는 중국역사를 신화적이고 신령스러운 역사가 아니라 인간적인 면을 강조하여 오제의 장사지낸 장소까지 기술함으로써, 역사적인 인물임을 강조하고 있다.
사마천은 총 130편 52만 6500자에 이르는『사기』를「本紀」12편,「表」10편,「書」8편,「世家」30편,「列傳」70편 등으로 편재하여 저술하였다. 사기의 이런 분류 방법은 기전체라 하는데, 천지자연의 원리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즉 12본기는 역법으로 볼 때 12간지와 관련되고, 10표는 천간의 10간(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과 관련이 있으며, 8서는 四方八方 등 방위의 개념과 관련이 있다. 30세가 역시 이 중에서 열전에 삽입시켜도 무리가 없는「공자세가」와「진섭세가」를 뺀다면 28편으로 별자리인 28수(宿)와 일치하게 된다. 70열전은 맨 마지막인 「태사공자서」를 「태사공열전」으로 볼 수 있고,「공자세가」와「진섭세가」를 집어넣으면 72열전으로, 천지와 음양의 성수(成數)관념에서 보면 역법에 기초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고대 중국인들의 우주관과 세계관에서 비롯한 것이기도 하다.
사마천의 후예들인 중국인들의 우주관과 세계관이 현재 중국 곳곳에서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그들은 지금까지 신화인 3황5제를 현실화시켜 중국의 핵심인 한족(漢族)만이 황제의 후손이며, 이외의 모든 민족은 동이(東夷)·남만(南蠻)·북적(北狄)·서융(西戎)이라는 화이관(華夷觀)을 일관되게 유지해 왔다. 그동안 중국은 황하유역의 하- 상(은)- 주나라로 이어지는 고대국가단계를 역사의 진리처럼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이 정설을 깨뜨리는 유적이 요서지역의 소하서문화(小河西文化, BC7000-BC6500)를 필두로 무려 6곳에서 발견됨으로서 역사의 변화를 시도하였다. 곧 한·당과 같은 중화제국주의의 부활이다.
황제의 찬란했던 대일통의 시대로 중화제국주의의 부활을 알리고 싶은 중국의 욕망은 대륙 전역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염황의 조상(彫像)과 황제릉이다. 이번에 만리장성을 신장자치구에서 혜이룽장성까지 확대한 것도 그런 정신의 일환이다. 중국 중원문화의 중심지인 하남성 정주시 근교의 황하풍경구에는 미국의 자유의 여신상보다 8m 높은 황제와 염제의 조상(彫像)이 서있다. 중국인들은 이 상을 보며 염제와 황제가 역사적 실존 인물이었으며, 염·황 자손이 한 가족이라는 민족의 응집력을 강화해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가져올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황제릉(黃帝陵)은 헌원이 죽은 뒤 교산(橋山)에 묻혔다(黃帝崩, 葬橋山)는『사기』의 기록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이에 따라 전한(前漢) 한무제(漢武帝)가 교산(橋山)을 찾아 황제묘를 가묘 형식으로 성역화하면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섬서성의 황제릉은 서안시(西安市)에서 북쪽으로 200㎞ 떨어진 ‘혁명의 성지’로 불리는 섬서성의 연안시(延安市) 황릉현(黃陵縣) 북쪽으로 3㎞에 있다. 서안시는 기원전 1000년에 서주(西周)의 수도로 시작해 이후 진(秦)·서한(西漢)·서진(西晉)·전조(前趙)·전진(前秦)·후진(後秦)·서위(西魏)·북주(北周)·수(隨)·당(唐) 등 중국 13개 왕조의 수도였다.
황제릉은 우리나라 ‘단군왕검’과 같은 중화민족의 시조 황제(黃帝)의 묘지로 황제가 용을 타고 하늘나라에 오른 곳으로 전해지기 때문에 신성한 곳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이 능묘는 의관총(衣冠冢)이다. ‘천하제일릉(天下第一陵)’으로 불리는 황제릉은 중국인에게 단순한 능원이 아니라 한족의 구심점이자 마음의 뿌리이다. 그러나 현재 학계는 교산이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시 탁록현 온천둔향내 호구촌 서남의 교산으로 간주하고 있다.
황제의 선조는 웅씨(熊氏)였다. 웅국의 우두머리 소전(少典)과 부보(附寶)사이에서 태어난 황제는 헌원의 언덕에 살았기 때문에 성을 희(姬)와 공손(公孫)으로 하고, 헌원씨(軒轅氏)라 했다. 지금의 하북성의 탁록(涿鹿)에 정착한 황제는 중원의 주도권을 잡기 위하여 염제와 연합하여 구려족(九黎族)의 우두머리인 치우와 치열한 싸움을 전개하여 탁록의 뜰에서 치우를 물리치고 승리하였다.
치우는 후세에 전쟁의 신으로 추앙받았으며, 한국인들은 그의 얼굴을 대문 문고리나 기와에 조각해 놓아 악귀를 물리쳤다. 치우씨를 일명 ‘독아비’라 불렸는데, 이 용어는 뒤에 도깨비라 불리게 되었다. 치우천왕은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붉은악마의 응원기에도 사용될 만큼 한국인에게 친숙한 전설상의 인물이다.
한편 치우천왕을 물리친 황제와 염제는 다시 중원의 패권을 놓고 판천(阪泉)의 들판에서 3차에 걸친 결전을 하여 황제가 중원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이때부터 중원의 거주민들은 황제와 염제를 조상으로 섬겼으며 스스로를 염황자손(炎黃子孫) 이라 부른다. 황제는 창힐(蒼頡)로 하여금 문자를 제작하게 하고, 대요에게는 십간과 십이지를 만들어서 육십갑자를 만들게하고, 영륜에게는 악기를 제작하도록 하였다. 한편 부인인 누조는 여성들에게 누에치는 법을 가르쳤다. 이와 같이 후세 중국인들은 거의 모든 문물제도의 건립을 황제에게 돌리고 있으므로 황제를 ‘인문초조(人文初祖)’라 부른다.
황제릉이 있는 연안시, 염제릉이 있는 보계시, 진시황릉의 서안시를 포함하는 한반도 면적의 중국 섬서성 일대는 중국 문명의 원류라고 칭해진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당시, 강력한 한나라와 융성한 당나라의 재현을 표방한 개막식 주제가 강한성당(强漢盛唐)이다. 한·당의 수도였던 서안을 포함한 섬서성은 그만큼 중국을 이해하는 키워드라 할 수 있다.
섬서성은 진시황 병마용갱과 주변의 진시황릉, 유방과 항우의 운명의 순간이 됐던 홍문연 유적지, 당 태종 이세민과 서유기의 주인공 현장법사의 이야기가 담겨있는 대안탑, 당 현종과 양귀비의 러브 스토리가 나온 화청지, 중국 최대의 모스크인 청진대사, 중국 최대 규모의 평지성인 서안성, 제갈량이 순직한 보계시의 오장원 등 많은 역사유적지가 있다. 특히 서안의 흥교사는 현장법사의 묘탑과 현장의 두 제자인 규기와 신라의 학승이자 유식학의『해심밀경소』를 저술하여 티벳불교에 영향을 미친 원측(圓測, 613-696)의 묘탑이 있다. 올해는 꼭 지인들과 함께 섬서성으로 역사문화탐방을 떠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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