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삽화 권미영
은홍은 깊은 궁궐에서 응석받이로 자라서 혼자 길을 걸을 기회가 거의 없었다. 얼마만큼 걸어 왔을 때 앞에는 마을이 없었고, 뒤에도 여인숙이 없어서 쉴만한 것조차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은홍이 계속해서 앞으로 이 삼리를 더 가게 되자, 소나무 그늘이 빽빽하게 둘러싸이고 길이 분명하게 나있는 그곳에 오래된 사당하나가 보이는데, 크게 기뻐하면서 곧장 달려서 다가갔다.
사당 문에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그 위에 ‘軒轅廟’헌원묘라고 쓰여 있다.
은홍은 사당 안으로 들어가 땅바닥에 엎드려 절을 하면서 기원했다.
“헌원 聖主성주님! 성주님께서는 법도를 세워 의복과 예악과 면류관 등을 만들었으며, 시장을 열게 한 상고의 성군이십니다. 은홍은 成湯성탕의 31대손이고, 주왕의 자식입니다. 이제 부왕인 주왕이 무도하여 아내를 죽였으며 자식을 죽이려 하므로 은홍은 이렇게 피난하였사옵니다. 오늘 성스러운 헌원 황제의 사당에서 하룻밤을 편안히 묵은 뒤 내일 일찍 떠나겠습니다. 부디 헌원 聖帝성제님의 가호를 비옵니다!
만약 조그마한 땅을 얻어 이 몸을 보전한다면, 은홍은 그때 마땅히 이 사당을 다시 수리하고 성제님의 몸을 금으로 치장해 드릴 것입니다.”
은홍은 이렇게 말을 끝낸 후 하루 종일 걸어왔으므로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헌원 황제의 좌대 밑에 앉자마자 옷을 입은 채로 잠이 들었다.
한편, 태자 은교는 東魯동로로 가는 큰 길을 따라 줄곧 걸어갔다. 해가 막 저물려고 하여, 사오십리쯤 걸어가서 멈추었다. 눈앞에 큰 저택이 보이는데, 대문위에 太師府 태사부라고 적혀있었다.
은교는 스스로 “이곳은 벼슬아치의 집 같으니, 하룻밤 잠자리를 빌려서 자고 내일 일찍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은교는 바로 문을 두드렸다.
“안에 주인장 계십니까?”
한번 소리로 물었으나 안에서 응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은교는 문을 밀치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마침 안에서 길게 탄식하는 사람의 소리가 들려왔으며, 이어서 시를 읊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러 해 임금의 조칙을 관장하다가 죄를 얻었지만, 일편단심이 어찌 저절로 없어지리오! 임금을 보필함에는 국가를 위할 줄 아는 마음이 있었으며, 옳은 뜻 굳게 견지하여 사사로운 몸 돌볼 여지가 없었다. 妖孼요얼이 궁궐에서 생겨나 백성들로 하여금 원한의 귀신불이 되게 한다는 것을 누가 알았겠는가! 애석하게도 초야에 묻힌 신하의 마음은 궁궐에 가있는데, 황제의 궁궐을 두드릴 계책이 없어 신불에게 도움을 청해본다.”
은교가 안에서 시를 지어 읊조리는 것을 바깥에서 다 듣고 다시 문을 두드렸다.
“안에 사람 계십니까?”
안에서 인기척이 들리면서 묻는다.
“그 누구시오?”
해가 이미 저물어 시커먼 그림자로 서있는 사람이 분명하게 보이지를 않았다.
은교가 말했다.
“저는 친척에게 몸을 의탁하러 길을 나섰는데, 날이 저물어 이 저택에서 오늘 하룻밤을 묵고, 내일 일찍 길을 떠나고자 합니다.”
안에 있는 노인이 물었다.
“당신의 말소리는 마치 朝歌조가(은나라의 도성) 사람 같소이다.”
은교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늙은이가 물었다.
“당신은 시골에 사는가 아니면 도성안에 사는가?”
은교가 “도성에 살았습니다.”했다.
안에서 “당신이 도성에 살았다고 하니 들어오시오, 물어볼 것이 있다오.”
은교가 앞으로 나아가 얼굴을 처다 보더니, “이런, 당신은 승상이 아니십니까!”
조정에서 물러난 승상 商容상용은 은교를 보자, 절을 하며 말했다. “전하는 어떠한 일로 이곳에 왔습니까? 늙은 신하가 영접을 하지 못했으니, 그 죄를 용서하시기 바라옵니다.”
상용이 또 물었다.
“전하는 국가의 황태자이온데, 어찌 홀로 이곳에 오게 되었습니까? 반드시 나라에 상서롭지 못한 조짐이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자리에 앉으시고, 이 늙은 신하에게 상세히 들려주십시오.”
은교가 눈물을 흘리면서 주왕이 황후인 처를 죽이고 자식을 죽이려고 하는 일을 한바탕 상세히 알려주었다.
상용은 발을 동동 구르며 큰 소리로 외쳤다.
“어리석은 임금이 이런 횡포한 일을 저지를지 누구 알았겠는가? 인륜이 끊어졌으니, 三綱삼강을 이미 잃었다!
나 늙은 신하가 비록 몸이 초야에 있으나, 마음은 늘 궁궐을 품고 있었습니다. 평지에서 바람과 파도가 일어난다더니, 이러한 이상한 일이 생길 줄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황후가 마침내 참혹한 죽음을 당했고, 은교 ․ 은홍 두 분 전하가 떠돌며 도탄에 빠지는 변고가 생겼습니다.
백관들은 어찌하여 입을 다물고 감히 말하지 못하며, 임금의 안색에 개의하지 않고 극력 간언을 하지 않아, 조정이 정과 사가 뒤바뀌게 되었습니다. 전하께서는 안심하십시오. 늙은 신하와 함께 조가로 들어가 천자께 직접 간언을 하고, 잘못된 것을 바꾸게 하여 재앙과 어지러움에서 구하도록 하십시다.”
이어서 좌우를 불러 술자리를 마련하여 전하를 접대하도록 분부하였으며, 내일 상주문을 작성하겠다고 하였다.
한편, 은교가 재상 상용의 저택에 있을 때 殷破敗은파패와 雷開뇌개 두 장군이 병사를 이끌고 은교와 은홍을 추적하였는데, 비록 병사와 말이 삼천이지만 모두 늙고 쇠약하여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이었으므로 하루에 삼 십리를 가고 멈추었다. 삼일을 행군하였으나 백리 정도 겨우 따라갔다.
하루는 세 갈래 길에 도착했을 때 뇌개가 말했다.
“은파패 형님, 사람과 말을 이곳에 주둔시켜 놓고, 형님과 내가 각각 오십 명의 정예 병사들을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 뒤쫓아 갑시다. 형님은 東魯동로로 가고, 나는 南都남도로 갑시다.”
은파패가 말했다.
“그 말이 몹시 옳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날마다 노약한 병사들이 하루 삼십 리도 행군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뒤를 따라 잡을 수 있겠는가? 종래 일을 망치는 처사이다.”
뇌개가 대답했다.
“만약 형님이 먼저 쫓아가 잡으면 되돌아와 이곳에서 저를 기다리고, 제가 먼저 쫓아가 잡으면 이곳으로 돌아와 형님을 기다리겠습니다.”
“도리가 있는 말이니 그렇게 합시다.”
두 장군은 노약한 군졸들을 이곳에다 주둔시켜 놓고, 각기 날랜 병사 오십 명 씩을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 추적했다. 앞으로 은교와 은홍 두 왕자의 목숨이 어찌될지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자 육서성
옮김 김일륜
삽화 권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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