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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최 부잣집에서 배우는 300년 부(富)의 비결(하)
최진립 장군의 동상.(판도라티비 영상 캡처)

200년의 베풂은 은혜로 돌아와 활빈당의 위협을 모면하다

최동량 이후 몇 대를 거치면서도 윗대 선조들이 만든 가훈은 지속했고, 재산이 많음에도 항상 검소한 생활을 강조하며 실천했다. 나아가 새 식구가 된 며느리에게 집안 가풍을 전하기 위해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라는 가훈을 만들었다. 이는 최 씨 집안 며느리가 되기 위한 최소한의 기준이었을 것이고, 갓 시집온 며느리는 근검절약하는 속에서 겸양을 배우며 주변에도 본보기가 됐을 것이다.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면서도 들어올 수입을 고려해 지출을 계획했는데, 만석의 수입 중 10%는 구휼미로 챙겨두며, 10%는 과객을 위해 썼다고 한다. 과객의 종류도 다양해 친한 일가친척에서부터 학문을 논할 선비들과 여행객, 끼니와 잠자리를 해결하기 위해 들른 초라한 서민까지, 많을 땐 하루에 100여 명의 손님을 치렀다. 매일 찾는 사람이 이 정도라면 지금의 무료급식소의 역할을 일정 부분 담당했다고 볼 수도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룻밤 묵고 떠나는 과객에게 하루분의 양식과 노자까지 주어 보냈다.

이런 베풂 속에서 최 부자가 얻는 것도 많았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던 그 당시에는 사람이 전해주는 소식이 거의 전부였는데, 최 부자는 과객들과 만남 속에서 전국의 생생한 정보와 지식을 얻을 수 있었고, 문화를 교류하고 더불어 집안의 명성도 널리 알릴 수 있었다. 경주 근처를 지나는 과객은 일부러라도 최 부잣집을 찾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고종 31년, 전라도에서 봉기한 동학당이 많은 부자들의 재산을 탈취해 농민들에게 나누며 삼남지방을 휩쓸 때, 경주 주변에도 이들을 모방한 무리들이 활빈당을 만들어 의적을 자처하며 최 부잣집까지 덮치려 했다. 이때, 최진립 장군 이후 200여 년 동안 한결같이 베풀어 온 덕이 빛을 발했다. 활빈당 소식을 전해 들은 소작농들이 앞다투어 달려와 최 부잣집을 에워싸고 활빈당을 설득한 것이다. 최 부자는 즉시 소를 잡고 술상을 차려 굶주린 활빈당을 후하게 대접했다. 활빈당은 최 부자의 베풂에 감동해 조용히 물러났다.  

300년 부를 구국과 교육에 바치다

200년이 넘게 부를 유지하던 최 부자 집도 구한말 국운이 쇠퇴하면서 가문의 위기를 예감했다. 최진립의 10대손이었던 최현식은 자식들에게 조상 대대로 내려온 가문의 정신을 되짚어주며 “의(義)를 잃고 재물을 쌓으면 그 재물은 얼마 가지 않는다. 올바른 의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정쟁에 휘말리지 않도록 ‘중용의 도’를 지키라 주문했다.  

최준은 최현식의 아들로 만석꾼을 마감한 최진립의 11대 자손이다. 19세기 말, 과거제와 신분제가 폐지되고 신식학교가 들어서면서 최준은 신식 교육을 받고 싶어 했지만, 가문을 지켜야 하는 막중한 임무에 발이 묶여 집을 떠날 수 없었다. 국권침탈로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후 교육만이 살길이라 생각하고 간이 학교를 세워 글을 가르쳤지만,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이후에도 교육으로 나라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 여러 방면으로 후세 교육에 힘썼다.

그뿐만 아니라 최준은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백산상회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 백산상회는 백산 무역 주식회사로 거듭나며 사업을 확장하고 독립자금도 더 많이 지원했다. 하지만 일본 경찰의 방해로 독립 자금 기탁이 끊기고 경영도 어려워져 결국 문을 닫게 됐다. 이로 인해 최준은 당시로써 엄청난 부채를 떠안았다. 백산 무역 회사를 운영하는 중에도 여러 번 일본 경찰에 잡혀가 고초를 겪어야 했다.

이 외에도 조선 국권 회복단과 광복회에 참여해 조국의 독립을 위해 힘썼다. 또한, 도굴꾼들에 의해 경주의 골동품이 일본인에게 대량으로 팔려 가는 것을 보며 국가유물을 지켜야 함을 깨닫고 최대한 사 모았는데, 이것이 경주 박물관의 기본 토대가 됐다. 나라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육영회를 운영해 청년들을 해외로 유학시켰고, 해방된 후에는 남은 재산을 모두 정리해 대학을 설립하는 데 투자했다. 설립하는 과정에 많은 사람의 도움이 있었고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단 한 번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지켜내 영남대학교의 전신인 대구대학을 만들어냈다. 지금도 영남대학교 중앙도서관에는 국보급 도서를 포함한 5500여 권의 장서가 최준의 호를 딴 ‘문파 문고’를 만들어 보존돼 있다.

300년 마지막 최 부자는 구국과 교육을 진정한 의(義)라고 규정하고 재산 전부를 쏟아부었다. 우리나라 역사상 이렇게 장기간 부자로 살았던 가문도 없었으며 이렇게 많은 재산을 의롭게 사용한 가문도 없을 것이다.

최 부자가 살았던 집은 아직 경주 교동에 건재하다. 직접 찾아가서 마루에 앉아 볼 수 있고, 문화 해설사가 있어 최부자 이야기를 간략하게나마 들을 수 있다. 그동안 여러 사람에 의해 최 부잣집 이야기가 책으로도 나왔으며, ‘명가’라는 드라마로도 방영되기도 했다. 특히, 전진문의 <경주 최 부잣집 300년 부(富)의 비밀>은 경주 최 씨 교동 종친회가 조상들의 행장을 기록한 책자를 참고해 좀 더 자세하고 사실감이 넘친다. 또한 현대의 경제개념과 결부시켜 부자의 비밀을 풀어준다.

큰 부자는 하늘이 내리고 작은 부자는 검소함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듯이 비록 큰 부자가 될 수 없을지라도 경주 최 부잣집의 가훈을 참고해 검소함부터 실천해보는 것이 어떨까?

김정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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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립#경주#최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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