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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인이 기억할 ‘4.25 평화청원’ 20주년...중국역사 빛낼 '장거'
1999년 4월 25일 베이징 푸유 거리에 1만 명이 넘는 파룬궁 수련자들이 모여 평화적으로 공정한 대우를 호소하며 청원을 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은 이 행사를 왜곡 선전했고,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잔혹한 박해운동의 구실로 이용했다.(Minghui.org)

중국 공산당 집권 이후 가장 조용하면서도 가장 강력한 청원이라 하면 ‘4.25’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은 물론 세계사에 ‘평화적 청원’으로 기록될 ‘4.25’가 오는 25일 20주년을 맞이한다.

중국 현대사 중 ‘4.25’ 청원에 대해서는 관련자들 외 구체적으로 알려진 게 아직은 별로 없다. 그러나 방대한 중국 시장을 미끼로 국제사회를 ‘꿀 먹은 벙어리’로 만들어 온 중국 공산당의 실체가 조금씩 밝혀지면서 ‘4.25’에 대한 중국 국민들과 세계인의 관심이 점점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문화대혁명과 톈안먼 학살을 경험한 중국인들은 중국 공산정권을 향해 공개적으로 자신의 신념을 밝히기가 어렵다. 그런데도 ‘4.25’는 전체주의 국가인 중국에서 ‘자유, 인권, 평화’로 상징되는 좀처럼 드문 형태의 청원이었다.

1999년 4월 25일, 1만여 명의 중국 국민이 국무원 사무실이 있는 베이징으로 조용히 모여들었다. 그들은 어떤 조직적인 동원 없이 자발적으로 참여했고, 어떤 구호나 충돌 없이 모였다가 자신들의 입장을 밝힌 뒤 조용히 해산했다. 더구나 그들이 머물다 간 자리에는 쓰레기 한 점 없이 깨끗이 정리돼 있었다.

당시 주룽지 중국 총리는 국무원 사무실 옆에 있는 중난하이에서 무장 해제한 상태로 걸어 나와 평화로운 1만여 시민들을 맞이했고 마무리까지 조용히 전개됐다. 이로써 중국은 물론 세계사에 기록된 가장 평화롭고 성공적인 시위문화의 모범이 남겨졌다.

하지만 그로부터 3개월 후 1999년 7월 20일, 중국 공산당 수뇌 장쩌민은 중국의 모든 언론을 앞세워 파룬궁 수련자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바로 중국 정권이 지금까지 극도로 숨기고 있는 파룬궁 수련자들을 상대로 한 '대학살’의 서막을 연 것이다.

‘4.25’ 평화적 청원을 외면한 장쩌민은 중국 국민들은 물론 전 세계인을 '살인 공범자'로 몰아가려 했다. 그때부터 중국 공산당은 사실상 몰락의 길로 들어섰다는 게 중국 현대사에 정통한 전문가들의 공통적 견해이다.

심지어 5천 년 전통문화를 가진 중국인들은 이 사건 이후부터 ‘사람이 다스리지 않으면 하늘이 다스린다’라는 옛말이 실현되고 있다고 믿고 있다.

‘4.25’, 중국 공산당 미래를 결정한 기로

‘4.25’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영상을 통해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중국인들이 청원하는 국무원 사무실 바로 옆은 중국 지도자들이 거주하는 ‘중난하이’가 있다. 집과 사무실이 담장과 무장경비로 둘러싸인 그곳은 중국에서 가장 민감한 지역이다. 청원 사무실로 모이는 수련자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자 공안은 그들을 늘어서게 해 중난하이를 둘러싸도록 유도했다.

공산당 권력 서열 2위 주룽지 총리를 따라 중난하이에 들어갔던 파룬궁 수련자 스차이둥은 “(당시에) 관영언론이 파룬궁에 대해 왜곡 보도한 것을 파룬궁 수련자들이 바로잡으려다 체포됐다는 말을 듣고 중국 정부에 청원하러 갔다”고 말했다.

당시 4.25 현장에 있었던 장텐량 중국 전문가는 “주룽지 총리가 나왔다. 그는 경호원도 없이 혼자 나왔고, 얼굴은 미소를 띠었다”고 말했다. 그는 “주 총리가 이미 파룬궁 수련자들이 평화로운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 보였다”면서 당시 상황을 비교적 상세히 설명했다.

주 총리는 이야기를 들을 테니 대표를 정해 달라고 말했다. 스차이둥은 자발적으로 손을 들었고 그렇게 정해진 3명의 대표가 주 총리를 따라 중난하이 접견실에 들어갔다. 얘기를 듣고 주 총리는 국가신문방송위원회와 국무원 서기에게 지시하겠다고 말하고는 자리를 떴다.

스차이둥은 “잠시 후 주 총리가 보낸 관리들이 도착해 우리에게 질문한 내용과 우리가 답변한 내용을 노트북에 기록했다”고 말했다.

4.25 현장에 있던 파룬궁 수련자들은 예상하지 못했던 주 총리를 만나 진실을 알렸다. 그런 뒤 그날 저녁 톈진에서 체포됐던 45명의 파룬궁 수련자들은 석방됐고 이후 수련을 해도 별다른 방해가 없었다.

청원은 성공한듯 했다. 4.25 이후 3개월 동안 중국 전역의 수련자들은 중국 당국이 아주 잘 대처했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 기간 동안 국가 주석이었던 장쩌민은 파룬궁 탄압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국가의 모든 권력기구를 동원해 3개월 만에 파룬궁을 완전히 말살하려 ‘6.10 사무기구’를 설립했다.

당시 장쩌민 중국 주석과 주룽지 총리.(유튜브 영상 캡처)

장쩌민은 ‘파룬궁 수련자들의 경제를 파탄시키고, 명예를 실추시키며, 육체를 소멸해도 좋다’라는 비밀 지령을 내렸다. 심지어 파룬궁 수련을 옹호하는 사람들까지 투옥·고문해 전향시키고, 문제가 발생하면 ‘자살로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파룬궁 수련자 리웨이쉰은 “어떤 경찰이 나에게 파룬궁 수련자를 때려죽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자살했다고 하면 된다”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4.25’ 현장에 있었던 장텐량은 장쩌민이 4.25를 지켜보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당시 중국에서 주 총리를 반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장쩌민이었다며 “차량 2대가 중난하이에서 빠른 속도로 나오는 것을 봤고, 사람들은 장쩌민이 타고 있었다”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후 중국 공안들이 경비망을 두 줄로 늘려 시위대를 에워싼 채 긴장감을 조성했으나 파룬궁 수련자들은 끝까지 평정심을 유지했다.

중국의 민주화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4.25’를 대하는 주룽지의 태도와 장쩌민의 태도에따라 중국 공산당의 미래가 완전히 바뀔 수 있었다고 말한다. 

매일 수천만 명 새벽 연공...파룬궁 인기에 놀라

중국에서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들은 “중국 공산당이 죽이려고 덤비는 데 왜 파룬궁을 수련하는가? 목숨을 잃는 게 두렵지 않은가?”라는 질문을 가장 많이 받는다고 한다.

1999년 당시 중국에서는 수천만 사람들이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출근하기 전 파룬궁을 수련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따스한 잠자리를 뒤로하고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연공을 하게 한 것일까?

1999년 당시 중국에서는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매일 새벽에 일어나 출근하기 전 파룬궁을 수련했다.(밍후이왕)

아서 왈드론 펜실베니아 교수는 “중국이 안고 있는 총체적인 문제 중 하나가 사람들이 수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가치가 없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평범한 사람일수록 삶이 공허해진다. 당 간부들도 마찬가지인데 기공은 바로 그런 점에 호소하고 있어 주목받게 됐다”고 분석했다.

무신론 공산국가인 중국은 문화대혁명을 거치며 도덕이 실종됐다. 그런 상태에서 자본주의가 도입되자 ‘돈벌이’가 국가 차원의 종교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파룬궁은 그 모든 것을 바꾸어 놓기 시작했다.

중국 전통문화의 근간은 수련이다. 파룬궁은 중국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정신 수양 방법의 하나로 연공 동작을 통한 신체 수련과 ‘진·선·인(眞·善·忍)’을 기준으로 심성을 닦는 기공 수련이다. 중국 내 다른 기공 수련법들과 마찬가지로 파룬궁도 처음에는 중국 당국이 만든 기공과학연구회에서 관리했다.

파룬궁 창시자 리훙쯔 선생.(유튜브 영상 캡처)

파룬궁 창시자 리훙쯔(李洪志) 선생은 1992년 파룬궁을 기공과학연구회에 등록했다. 파룬궁은 인기 공파가 됐고 연구회는 리훙쯔 선생에게 기공사라는 칭호를 준 뒤 나중에는 대기공사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2년 동안 리훙쯔 선생은 중국의 거의 모든 주요 도시를 돌며 강의하고 수련을 지도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상을 받고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1994년 겨울, 파룬궁 수련의 기본 지침서인 <전법륜(轉法輪>이 출판돼 베이징 공안대학에서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이후 <전법륜>은 이내 베스트셀러가 됐고 이후 파룬궁은 널리 전해졌다.

반면 연구회의 파룬궁에 대한 불만은 쌓여갔다. 장얼핑 파룬궁 대변인은 “당시 기공과학연구회를 비롯해 관련 정부 기구는 모든 기공 단체들을 통해 돈을 벌었다. 파룬궁은 그런 점에서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고 전했다.

결국 1996년 초 파룬궁은 연구회에서 탈퇴했다. 기공과학연구회가 과학연구는커녕 각종 공파를 이용해 돈만 벌고 있었기에 진정한 수련이 목적이었던 파룬궁의 ‘탈퇴’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장 대변인은 “파룬궁이 빠르게 전파되자 처음에는 중국 당국도 파룬궁의 인기에 놀랐다”며 “파룬궁의 규모가 점점 커지자 중국 공산당이 주목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파룬궁 서적 출판 금지

중국 당국은 가장 먼저 언론을 동원했다. 1996년 관영신문인 광명일보는 <전법륜>을 비난했다. 중국의 경우 언론이 파룬궁을 모함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공산당 내의 누군가가 파룬궁을 문제 삼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리웨이쉰은 “당 차원에서 모든 정치적 박해를 시작할 때, 그들은 먼저 언론부터 시작해 단계별로 목표물을 쓰러뜨린다”며 “그것이 바로 그들이 항상 사용하는 방식”이라고 강조했다.

파룬궁을 수련하던 많은 사람들이 광명일보에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일부는 고위관리들에게도 편지를 보냈다. 신문사는 곧장 기사를 철회했다. 하지만 파룬궁 비방 기사가 실리면 수련자들이 항의하고 신문은 사과한 뒤 기사를 철회하는, 그런 패턴은 이후 여러 차례 반복됐다.

1996년이 지나갈 무렵 장쩌민 정권은 모든 파룬궁 서적 출판을 금지했다. 이듬해 공안국은 파룬궁 수련자들을 대상으로 ‘사교'라는 증거를 찾기 위해 조사하기 시작했으나 실패했다.

당국은 파룬궁을 종교로 분류할 수 있다는 결론조차 내리지 못했다. 중국에서 종교로 규정하려면 예배당이나 불당이 있어야 하고 의식을 거행하는 조직 형태를 갖춰야 하는데, 파룬궁은 아무런 종교적 형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파룬궁은 자원봉사자들이 무료로 수련을 전하고 배우는 느슨한 네트워크 형태였다.

파룬궁을 수련하는 조지는 “그들은 수련장에서 수련을 돕는 자원봉사자로 우리는 '보도원'이라고 부른다. 소위 지도체계라고 하는 것은 전혀 없다”라고 말했다.

1998년에도 공안국은 다시 파룬궁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무엇이든 빌미를 찾으려 했다. 전국을 대상으로 파룬궁 수련장과 수련자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괴롭히던 그들은 1999년 4월 11일 빌미를 만들어냈다.

텐진 교육대학 청소년 잡지에 ‘청소년들은 왜 기공을 수련하면 안 되는가’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내용은 파룬궁을 포함한 모든 기공 수련과 리훙쯔 선생을 비방하는 내용이었다. 수련자들이 청원 활동을 시작하자 공안 당국은 신문사에 기사철회를 하지 말도록 지시했다.

공안 당국은 기사 철회를 요구하는 사람들을 폭력을 동원해 강제 해산시켰고, 그 과정에서 45명의 수련자를 체포했다. 소식을 접한 수련자들이 즉시 시와 성 정부에 청원했지만 그들은 권한 밖이라는 답변만 할 뿐 청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청원을 위해 베이징으로 직접 향한 것이다.

스 차이둥은 “그 사건에 대한 소식은 빠르게 퍼졌다. 톈진이 베이징에서 가까웠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사실을 아주 빨리 알게 됐다”면서 4.25가 시작된 정황을 설명했다.

4.25는 중국 역사의 분수령이자 대 전환점으로 볼 수 있다. 1992년 파룬궁이 전파되고 7년 만에 파룬궁 수련자들은 1억 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조지는 당시 상황에 대해 “그날이 1949년 중국 공산정권 수립 이후 처음이자 유일한 날이었을 것이다. 중국에서 가장 민감한 지역에서 그렇게 평화로운 집회를 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1만 명이 집결한 청원은 그렇게 조용하게 시작해 조용하게 끝난 뒤  파룬궁의 인기는 더해 갔다.

장 대변인은 “4.25 이후 관영언론도 더는 파룬궁을 반대하는 정책은 없다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사람들은 명상과 수련의 자유를 얻은 것이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1999년 7월 20일 모든 것들이 변했다. 장쩌민 정권은 3개월간 물밑에서 준비한 파룬궁 말살 정책을 잔혹하게 펼치기 시작했다.

이든 굿만('사라진 중국' 저자).(유튜브 영상 캡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왜 그렇게 신념을 지키는가?

파룬궁 수련자들을 향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왜 그렇게 신념을 지키려고 하는가?’라는 물음에 이든 굿만('사라진 중국' 저자)은 이렇게 분석했다.

“파룬궁은 진선인(眞善忍) 원리를 강조했기 때문이다. 진선인을 거론하는 것은 중국의 관료적 정치체계를 모욕하는 것과 같다. 그중에 특히 진실, 그것은 가장 큰 힘을 갖고 있다.”

중국에서 파룬궁 수련을 포기하지 않는다고 감옥에서 고문을 받아 생명이 위독했던 고성녀 씨는 현재 한국에 들어와 건강한 사회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녀는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한 이후 “수련이 곧 생활 자체”라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파룬궁을 수련한 이후 새 생명을 얻었다. 중국에 있을 때 유치원 선생님과 가수 활동을 병행하면서도 늘 심장병으로 고생했다. 하지만 파룬궁을 수련한 이후 놀라운 변화가 찾아왔다. 심신 건강이 뚜렷이 좋아졌으며 어느새 나 자신보다 상대방을 먼저 배려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돼 있었다.”

공영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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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룬궁#4.25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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