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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로 하버드 교수가 된 중국인, 청나라 수재 ‘과곤화’
하버드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줄곧 청나라 관복을 입고 강단에 선 과곤화(戈鯤化).(퍼블릭 도메인)

하버드에서 강의한 최초의 중국인,
화령(花翎 ‧청나라 관모)을 쓰고 조화(皁靴‧검은 비단으로 만든 신발)를 신은 청나라 인물,
그는 당시 미국인들에게 유명했지만, 지금은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하버드 초청교수가 되다

과곤화(戈鯤化)는 자가 연균(硯畇) 또는 언원(彦員)으로 청나라 도광 18년(1838년) 안휘성(安徽省) 휴녕현(休宁县)에서 태어났다. 150년 전 그는 영어권에 중국어와 유가문화를 전파한 인물이다.

태어날 때부터 총명하고 근면하며 배움을 좋아한 그는 특히 시사(詩詞)와 고전문학을 열심히 공부했다. 소년 시절에 이미 수재로 명성을 날렸고 나중에 향시에 급제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태평천국군을 평정한 황개방(黄开榜) 휘하에서 막료로 지냈다. 나중에 상해 주재 미국영사관과 녕파(寧波) 주재 영국영사관에서 비서 겸 중국어 교사로 17년을 지냈다.

그 기간에 그의 관직은 정오품인 녕파 후선동지(候選同知)로, 남색 모자를 썼다.

과곤화는 정통적인 지식인으로, 국가를 생각하는 마음이 깊었다. 그는 일찍이 ‘풍류스러운 지난 시대의 인연을 잘못 알았도다(錯認風流夙世緣)’, ‘가산을 탕진하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네(況破家資業未精)’, ‘마약이 병마를 이긴다고 누가 믿으랴(誰信煙魔勝病魔)’ 등의 시를 통해 청나라 말기에 성행한 음란, 도박, 마약 등에 대해 깊이 우려한 바 있다. 그는 <인수당시초(人壽堂詩鈔)>와 <인수집(人壽集)>이란 시집을 남겼다.

그는 민간 가옥을 수리하고 사찰을 짓는 데 참여했고 일찍이 ‘진예(晉豫) 흉년(1877~78년 사이 중국 하남과 산서 지역에 발생한 대기근)’ 때는 의연금을 낸 적도 있다. 녕파에는 서양인들이 만든 신강교(新江橋)가 있었는데 과곤화의 발의로 자금을 모아 이 다리를 사서 현지 백성들에게 혜택을 주기도 했다. 일찍이 녕파의 유명 인사 서시동(徐時棟)은 “연꽃으로 시의 품격을 떠보려 하였더니 사람의 품성을 빼닮아 서로 베푸네”라며 과곤화의 시를 칭송했다.    

1877년 2월 미국 상인이자 중국통인 나이더(鼐德)가 하버드대학 총장 찰스 엘리엇에게 편지를 보내 중국어 교사를 하버드로 초빙할 것을 권유했다. 중국어와 중국 문화를 가르치고 미‧중 간의 정치‧경제계의 교류를 위한 문화적 기초를 다지자는 취지에서였다.

중국인을 하버드로 초청해 중국어 교육을 맡긴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구상이었다. 하버드대학은 학풍이 진취적으로 개방적인 데다 총장인 엘리엇 역시 멀리 보는 안목을 지녔기에 나이더의 건의에 흔쾌히 동의했다.

나이더의 부탁을 받은 영국인 허드(赫德)는 나중에 중국어 선생을 물색하다 녕파 세무사인 미국인 에드워드 드류(杜德維‧중국 이름 두더웨이)에게 이 일을 맡겼다. 드류는 자신의 중국어 선생이었던 과곤화가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고 판단했다.

과곤화는 녕파 주재 영국영사관에서 다년간 번역에 종사해 하버드대학에 추천할 가장 좋은 후보로 인정받았다.(퍼블리 도메인)

1879년 5월 드류는 하버드 총장에게 서신을 보냈다.

“제가 이미 학문에 조예가 깊은 중국 신사이자 관원을 물색해 놓았습니다. 그는 3년 임기의 중국어 교사로 하버드에 가길 원합니다. 그는 작가이자 일찍이 영국 영사관에서 다년간 번역 업무를 맡은 적이 있습니다.”

한편 태평양 건너편에서는 이미 미국 기업인들이 하버드대학에 8,750만불을 기증해 중국인 교사가 3년간 미국에서 머물 수 있게 했다.

1879년 5월 26일 하버드의 위탁을 받은 다이더와 과곤화는 임용계약서에 서명했다. 기간은 1879년 9월 1일부터 1882년 8월 31일까지였다. 이 기간에 매달 200불을 주기로 했는데, 이는 당시 미국인 평균수입의 두 배 정도였다. 수행원을 포함한 왕복 여행비는 모두 학교 측에서 부담하기로 했다.

1879년 7월(음력 5월) 과곤화는 가족과 하인 및 통역원과 함께 상하이에서 영국 선적의 선박에 타고 50일이 넘는 여정을 거쳐 미국에 도착했다.

과곤화가 미국에 도착한 후 자신을 추천해준 에드워드 드류에게 보낸 감사 편지.(퍼블릭 도메인)

중국문화를 널리 전파하기 위해 힘쓰다

하버드에 도착한 과곤화는 ‘벙어리 영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고 아주 빨리 유창하게 영어로 대화할 수 있게 됐다. 심지어 자신의 시를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동서 문화 차이를 처리하는 데 있어서도 기지를 잘 발휘해 풍모를 잃지 않았다.

그는 재직 기간 내내 청나라 관복을 입고 강단에 섰으며 학생들에게 스승을 공경하고 도를 중시할 것을 요구했다. 그의 수강생 중에는 하버드 본교생뿐 아니라 중국을 알고자 하는 학자, 외교관, 세관, 기업 및 선교사들도 있었는데, 학비만 내면 누구나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그의 강의 내용은 상당히 풍부하고 준비도 철저해 수강생들에게 큰 호평을 받았다.

그는 재직 기간 내내 청나라 관복을 입고 강단에 올랐다. (퍼블릭 도메인)

그는 교과서에 얽매이지 않았다. 영국인이 편집한 <언어자이집(語言自邇集)>이란 교재는 북경 표준어를 썼지만, 그는 남경 방언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왜냐하면 청나라 관원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남경어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과곤화는 중국 전통문화가 서방보다 비할 바 없이 뛰어나다고 여겼지만, 그렇다고 서양인들에 대해 오만하거나 편견을 갖지 않았다. 그는 유가 특유의 통달과 실무, 그리고 해박한 학식으로 적극적으로 미국 사회에 융화하면서 중국 문화를 전파하는 데 힘썼다.

진한 눈썹과 반짝이는 눈을 가진 과곤화는 청나라 관복을 입고 화령을 쓰고 조화를 신었다. 신사답게 고귀하고 우아한 행동거지로 강연회나 파티 환영회 등 공개석상에 나타나곤 했다. 그의 복식과 몸가짐은 중국 문화를 가장 선명하게 알린 명함과 같았다. 그는 늘 유창한 영어로 자신을 소개하고는 자신의 시 또는 당송시대의 명시를 암송하곤 했다. 마지막에는 우아한 몸가짐으로 몸을 숙여 감사 인사를 했다. 침착하고 편안한 그의 태도는 푸른 눈의 미국인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형형한 눈빛의 과곤화는 행동거지가 신사처럼 고상하고 우아했다.(퍼블릭 도메인)

하버드 신학대학원 원장 알포드는 그를 소개하면서 “다른 사람을 방문할 때는 신사의 노련한 기지를 갖추고 우리 사회의 매너를 존중하지만, 손님을 접대할 때면 늘 중국식 예절로 대접하곤 했다”고 평가했다.

과곤화는 미국인들을 위한 중국어 교재인 <화질영문(華質英文)>을 편찬했는데, 이 책에는 자신이 창작한 중국어 시 15편이 영문 번역 및 주석과 함께 실렸는데, 심지어 평성과 측성 발음까지 표시했다. 이는 역사상 최초로 중국 시사(詩詞)를 소개한 중영문 대조 교재였다.

<화질영문(華質英文)>에 실린 첫 번째 시는 ‘선자봉지입사절열사(先慈奉旨入祀節烈祠)’였다. 함풍(咸豊) 10년 태평천국이 상주(常州)를 함락했을 때 과곤화의 모친이 자진해서 순절하자 황제가 이를 표창해 절렬사(節烈祠)에 모시게 했다. 이 시는 바로 과곤화가 기개를 중시하는 중국인들의 문화적 특징을 전달하기 위해 선택한 것이다.

찬사와 예우

미국 유수의 매체들도 앞다퉈 그의 도착을 보도했다.

1879년 9월 25일 하버드 교보에는 ‘중국어 교수 인터뷰’라는 문장에서 과곤화에 대해 아주 높은 예우를 했다. 보도에서는 그를 “목소리와 태도에서 열정과 성실함이 잘 드러난다”고 묘사했다. 분명한 것은 서방 언론에 대한 과곤화의 대응이 서양인들의 상상을 뛰어넘었다는 점이다.

1880년 1월 9일, 과곤화 교수가 도서관에 <인수당시초>를 기증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는 하버드대학이 이 일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1882년 2월 14일, 과곤화는 폐렴으로 타향에서 사망했다. 향년 48세였다.

보스톤 데일리 텔레그레프(Daily Telegraph)는 그에 대해 “우리 거리에 동방의 색채를 전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동방식의 장관(壯觀)과 동방식의 편안함, 그리고 침착과 조화를 보여주었다. …… 우리는 그가 보여준 문명을 향해 가는 동시에 또 그를 따라 배워야 한다”고 평가했다.

보스톤의 다른 신문들도 연속으로 과곤화 교수의 서거 소식을 보도하면서 그를 회고하는 문장들을 게재했다.

“과곤화의 언행을 통해 우리는 사람과 사람 간에 형제와 같은 관계가 존재함을 발견했다.”

“순결하고 정직한 영혼, 따스한 마음을 가졌으면서도 만날 때마다 매혹적인 미소를 보였던 사람.”

“그의 독특한 사교성은 각계 인사들과 교제할 수 있게 했고,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했다.”

1882년 2월 15일부터 연속 3일에 걸쳐 하바드 교보에 과곤화 교수 사망 소식이 보도됐다. 2월 17일에는 ‘과곤화 교수 장례’라는 문장이 발표됐다.

2월 15일 당일 하버드대학은 성대한 서양식 장례 의식으로 미국에 중국 문화를 전파한 선구자를 송별했다. 추도사로 그를 애도하고 기렸다.

“그는 평생 인자했고 사상이 풍부했다.” “우리는 중국의 대성인 공자에게서 유사한 품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과곤화가 사망한 후 하버드대학은 5천 불을 모금해 그의 아내와 아이들을 위로했다. 1883년에는 그의 아들 과붕운(戈朋雲)이 하버드에 유학을 왔다. 그는 나중에 상하이에서 유명한 웅변가이자 가정교육 창도자가 됐다.

글/ 중자슈(宗家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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