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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오쯔양 前비서 “톈안먼 사태는 덩샤오핑의 쿠데타"
  • 장둔(張頓) 기자
  • 승인 2018.06.05 10:34
1989년 5월 19일, 자오쯔양(趙紫陽)과 원자바오(溫家寶)는 톈안먼 광장에서 단식 농성을 진행 중인 학생들을 만났다. 이후 덩샤오핑(鄧小平)은 두 인물을 당 안팎 모든 직무에서 해임했다. 자오쯔양은 2005년 사망 때까지 가택 연금에 처해있었다.(AFP)

2005년 사망한 자오쯔양(趙紫陽) 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의 비서였던 바오퉁(鮑彤, 86)은 “1989년 6월 4일 톈안먼 광장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에 대한 무력 진압은 자오쯔양의 실각을 노린 덩샤오핑(鄧小平)의 음모였다”고 밝혔다.

중국 대학생들의 민주화 요구는 1989년 당내 개혁파로 분류되던 후야오방(胡耀邦) 전 당 서기의 사망을 계기로 점점 달아올랐다. 당해 6월 4일 덩샤오핑은 학생 시위를 ‘폭동’으로 몰아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 집결한 학생과 시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최근 공개된 영국 기밀 정보에 따르면 당시 사망한 학생과 시민의 수는 약 1만 명 혹은 그 이상에 달한다.

이번 6월 4일은 톈안먼 사태 29주기였다. 마오쩌둥(毛澤東) 비서 리루이(李鋭)의 딸 리난양(李南央)은 5월 23일 뉴욕타임스에 원자바오와의 대담 내용을 기고했다.

해당 기고문에 따르면, 원자바오는 민주화 운동을 무력 진압한 이유에 대해 ‘공산당 정권을 지키기 위해’라는 종전의 인식을 부인했다. 원자바오는 “민주화 운동을 탄압한 이유는 덩샤오핑의 출세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소련의 스탈린이 흐루시초프에 의해 비판된 것처럼, 덩샤오핑은 자신의 사후에 원자바오에게서 비판당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덩샤오핑은 이러한 상황을 피하고자 학생 시위를 이용했다는 것이다.

1987년 최고 권력자 덩샤오핑은 ‘부르주아 자유화 반대’를 주창하며 개혁·개방 노선을 주장하는 후야오방을 당 총서기에서 해임했다. 같은 해 정치국원으로까지 강등된 후야오방은 1989년 숨지기 직전까지 정치 개혁을 호소했다.

1989년 4월 15일 후야오방이 사망했다. 18일 최고 지도부인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후야오방의 장례식을 논의했다. 리펑(李鵬)은 자오쯔양에게 학생들의 반응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이에 당시 자오쯔양은 “우리도 후야오방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으므로 학생의 추모 활동을 금지할 이유는 없다”고 말했다.

원자바오는 “해당 발언을 계기로 덩샤오핑이 자오쯔양을 경계하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덩샤오핑의 손에서 해임된 후야오방의 추모 허용은 곧 덩샤오핑 자신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원자바오는 이어 “자오쯔양의 발언을 들은 덩샤오핑은 그를 ‘중국의 흐루시초프’라고 생각하며 곧바로 경계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흐루시초프는 스탈린 시대의 개인숭배, 독재 정치 숙청 사실을 공표한 인물이다. 덩샤오핑은 자신이 사망한 후 명예가 실추되는 상황을 피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전해진다.

4월 18일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는 후야오방의 장례식에 관해 “전국의 각 정부 기관과 해외 대사관에서는 반기를 내걸고 10만 명 규모의 영결식을 진행한다” “영결식 사회는 양상쿤(楊尚昆) 국가주석이, 조사 낭독은 자오쯔양이 맡는다” “덩샤오핑도 영결식에 참석한다” “조사에서 후야오방을 높이 평가하는 문언을 포함한다” 등과 같은 세심한 논의가 진행됐다.

한편, 해당 회의를 통해 당해 4월 20일 <후야오방 동지의 서거에 대해서>라는 성명서가 발표될 예정이었다. 성명문을 통해 학생들의 분노를 진정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당시 “후야오방이 덩샤오핑에 의해 실각했고, 이에 분노한 나머지 심장 발작이 일어나 결국 숨졌다”라는 소문이 돌았고, 이는 학생 시위가 발생한 원인 중 하나였다.

그러나 회의 다음날인 19일, ‘10만 명 규모의 영결식 개최’와 ‘후야오방을 평가하는 문언 작성’에 관한 계획은 돌연 기각됐다. 그날 밤, 선언문 발표 계획 또한 취소됐다.

“당시 계획을 각하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자는 덩샤오핑 한 명밖에 없었다. 학생과 당국과의 대립을 격화시키기 위해 정치적 수를 쓴 것이다.”

원자바오에 따르면, 19일 자오쯔양은 덩샤오핑을 향해 국면이 혼란한 상태에서 북한 방문이 예정대로 이뤄질 수 있는지 물었다. 당시 덩샤오핑은 “그렇다”고 대답하면서, 자오쯔양이 귀국하는 대로 그를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임명할 계획이라는 언급을 비쳤다. 이미 자오쯔양에 경계심을 품고 그를 위원장의 지위에서 끌어내리며 덩샤오핑은 자오쯔양에 포착되지 않도록 일부러 군사 위원회 주석을 임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22일 후야오방의 영결식에서 자오쯔양은 18일 다른 상무위원들과 함께 의결한 세 가지 사안을 확인했다. 덩샤오핑은 이를 보고받았으나 반대하지 않았다. 해당 세 가지 사안은 다음과 같다. ▲영결식 후에 학생들이 학교로 돌아가도록 설득할 것 ▲학생이 폭도화하지 않는 한 무력으로 진압하지 않을 것 ▲'민주화, 반부패' 등 학생들이 요구하는 사항들을 대화를 통해서 해결할 것

자오쯔양이 23일 북한을 방문하기 전까지만 해도 덩샤오핑은 상무위원들이 결정한 세 가지 계획을 실행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25일 덩샤오핑은 돌연 학생들의 항의 활동을 ‘폭동’으로 규정하고 진압에 착수했다.

하지만 원자바오에 따르면 4월 25일 시점에서는 대부분 학생들이 학교에 돌아가면서 집단 행동이 이뤄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학생과 당국과의 대립을 격화시키고 이 책임을 자오쯔양에 밀어붙여 결국 퇴임시키기 위해 사건을 왜곡했다.

26일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머리기사에서 “학생 시위는 옳지 않은 속셈을 가진 일부 인사들이 정부와 현행 정치 제도의 전복을 꿰하는 음모이다”라는 논설을 발표했다. 소위 ‘426사설’로 불리는 이 기사로 인해 베이징의 대학생들이 격노했고, 항의 시위가 다시 벌어졌다.

27일 베이징의 대학생 자치 연합회가 주최한 항의 활동에 5~10만 명의 대학생이 참여했다. 주요 대로에 모인 그들은 톈안먼 광장으로 행진했다. 당시 수많은 베이징 시민이 이들을 지지했다.

4월 30일 북한에서 돌아온 자오쯔양이 발견한 것은 분노가 절정에 이른 학생들이었다. 중국 최고 지도부는 자오쯔양을 필두로 한 융합파, 그리고 리펑을 수장으로 한 강경파로 이분화돼 서로 대립하기 시작했다.

5월 11일 학생들은 ‘인민일보’를 향해 426사설의 취하를 요구하며 단식 농성을 시작했다.

이 가운데 5월 13일 소련 공산당의 고르바초프 서기가 방중했다. 고르바초프와 자오쯔양은 16일 회담을 가진 뒤 기자들 앞에 모습을 보였다. 당시 자오쯔양은 “덩샤오핑은 여전히 중요한 인물”이라며 최종 결정권은 덩샤오핑이 쥐고 있다는 사실을 시사했다.

5월 17일 덩샤오핑의 자택에서 열린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회의에서 다른 상무위원은 자오쯔양을 비판했다.

이 회의에서 덩샤오핑은 학생들의 항의를 신속하게 잠재우지 않으면 내전 또는 ‘2차 문화 대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강한 어조로 말했다. 덩샤오핑은 베이징 시내가 비상사태에 빠졌다는 것을 명분으로 계엄령을 선포하겠다고 선언하고 군의 무력 진압을 명령했다. 이에 반대했던 자오쯔양은 회의 직후 사표를 제출했다.

바오퉁은 “자오쯔양의 뜻에 비추자면 학생 시위는 정상보다 빠른 단계에서 진정된 것”이라고 했다.

또 원자바오는 “덩샤오핑은 베이징 시내에 계엄령을 선포하는 방안을 자오쯔양이 반대할 것이라고 미리 예상하고 있었다. 이에 비춰 볼 때, 5월 17일 회의에서 계엄령 발동을 꺼낸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이로 인해 자오쯔양이 부득이하게 사임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원자바오는 “그리하여 29년 전의 톈안먼 사건은 실질적으로 자오쯔양의 실각을 노린 덩샤오핑의 쿠데타이다”라고 단정했다.

장둔(張頓)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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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오쯔양#민주화_운동#천안문_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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