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중국 사회
<마싼자에서 온 편지> 연재3: 1장 신참(1)
중국 랴오닝성 마싼자(馬三家) 노동교양소 위치(저자 제공)

◇ 제1장 신참 ◇

해 질 무렵, 공중에는 까마귀 떼가 선회하고 노동교양소에는 잿빛 하늘이 낮게 내려 앉았다.

멀리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마치 방금 지옥에서 기어 나온 귀신처럼 비틀거리며 걸어왔다. 어떤 사람은 검푸른 묘비를 짊어졌고, 또 어떤 사람은 ‘큰 귀신(大鬼)과 작은 귀신(小鬼)’을 안고 있었으며, 해골이 한가득 든 주머니를 멘 사람이 있는가 하면 손뼈, 발뼈를 어깨에 짊어진 자도 있었다.

그들은 지친 발걸음으로 하나둘씩 낡은 건물에서 나왔다. 옷은 남루했고 온몸은 오물투성이였다.

주머니 밖으로 어린아이의 손뼈가 삐져나왔다. 주머니에는 조그만 해골도 많았는데 애기 두개골 같았다. 뻥 뚫린 눈자위는 주머니에서 밖을 내다봤다.

장량은 깜짝 놀랐다. ‘설마 사람의 뼈를 가공한단 말인가? 시체 가공 공장이 어째서 이리로 왔지?!’

몇 년이 지난 뒤에도 그때의 장면을 떠올리면 여전히 소름 끼치고 황당했다. 당시 그는 막 6대대에 온 참이었다.

“저건 8대대예요. 이제 일이 끝난 거죠.” 선임이 옆에서 말했다.
 

1. 6대대 신참

1)

톈구이더(田貴德)는 방으로 들어온 후에야 머리를 들 수 있었다. 더는 그의 머리를 누르던 전기봉도 없다.

시커먼 얼굴이 그를 쳐다봤다.

“여기가 어디입니까?”

톈구이더는 정신이 흐릿한 채 물었다. ‘시커먼 얼굴’은 힘없는 미소로 옆 사람에게 고갯짓을 하며 말했다.

“니가 말해줘라, 여기가 어딘지.”

톈구이더는 그제야 자신이 마싼자에 있음을 알았다.

호송차에서 내릴 때 바람 때문에 머리가 차가웠다. 베이징보다 훨씬 추웠다. 베이징 노동교양 파견처(수감자를 여러 노동교양소로 보내기 전 임시로 수용하는 노동교양소)의 경찰은 그를 고향 허베이(河北)성으로 보낸다고 속였다. 톈구이더(44세)는 허베이성 바오딩(保定) 사람이다.

파견처가 긴급 집합을 내리자, 수감자들은 마당에 줄줄이 쭈그리고 앉았다. 두 손은 교차해 뒤통수를 감쌌고 반들반들한 머리를 가랑이 사이로 넣었다. 경찰들이 전기봉을 든 채 왔다 갔다 하면서 “움직이지마!”라고 계속 고함쳤다.

경찰이 곳곳에 깔려있어 파견처 정문 밖 도로 양옆으로 먼 곳까지 완전 무장한 경찰들이 늘어섰다. 호송차는 일반 관광버스와 똑같아 아무 표시도 없었다.

수감자 2명씩 한 조가 되어 수갑이 채워졌고 등을 구부려 차에 올랐다. 톈구이더가 머리를 들자 바로 전기봉 하나가 그의 머리를 내리눌렀다. “머리 숙여!”

차 안에서도 머리만 들면 때렸다. 머리를 반드시 앞좌석 등받이 아래로 둬야 했기에 머리를 들 수 없었다.

‘꼭 돼지가 팔려 가는 것 같구나.’ 창문 커튼이 쳐진 채 40~50명의 수감자가 이렇게 호송차에 실려 갔다. 누구도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했다.

훗날 한 경찰에게서 들으니, 그들은 1인당 800위안(약 13만원)에 마싼자 노동교양소로 팔린 것이었다. 당시 2008년 4월 초였다.

톈구이더는, 마싼자에 도착해 처음 고개를 든 후 다시는 창밖을 보지 못하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언제 어디서든 설령 밤에라도 창밖을 내다볼 수 없었다. 경찰은 “누구도 창가에 다가가면 안 돼!” “발견 즉시 때릴 것이다. 화장실에서도 창밖을 볼 수 없다”라고 말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보는 것도 안 됩니까?”

“안 돼. 규정 위반이다.”

2)

톈구이더와 달리 장량은 출발할 때부터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알았다.

안경을 쓴 장량은 커튼 사이로 이정표가 모두 동북 랴오닝성 방향인 것을 봤다. 가끔 스쳐 지나가는 앞차의 번호판은 ‘랴오(遼) A’가 표기됐고 욕지거리를 해대는 경찰들도 모두 동북 말투였다. 장량은 마싼자에 간다는 것을 직감했다.

파견처 경찰은 일찍부터 그에게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으면 마싼자에 보내겠다”고 협박했다. 그는 의아해했다. 마싼자에 정말 남자 수용소가 있단 말인가? 마싼자 여자 수용소는 들어봤다. 이전에 여자 파룬궁 수련자 18명이 남자 감방에 강제로 넣어졌다고 들었다. 하지만 당시 관영 언론은 줄곧, 남자 파룬궁 수련자는 마싼자에 수감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42세인 장량은 이제 체포는 여덟 번째, 노동교양은 두 번째였다.

한번은 중국 남방에서, 또 한 번은 중국 북방에서 노동교양을 당했다.

남방에서는 조건 없이 풀려났다.

그러나 이번에는 더 큰 시련이 있을 거란 느낌이 들었다.

차에서 내리자 날은 이미 어두웠다.

위장복을 입은 사람들이 운동장에서 이미 대기하고 있었다.

“머리 숙여!” 그들은 곤봉을 휘둘렀다.

고개를 들어 두리번거리는 사람은 바로 곤봉을 맞았다.

“두리번거리면 안 돼!”

“줄 서서 위층으로 올라가!”

3층으로 올라 로비를 지나고 통로로 들어서자 ‘6대대, 폐쇄구역’이라고 쓰인 팻말이 보였다.

마싼자 남자 제2 수용소. (저자 제공)

3)

“창문에서 1m 밖으로 떨어져라!”

다음날 점호 때, 장량은 마침 창문 가까이 있었다. 기회를 봐 밖을 내다보았다. 정원과 운동장, 그리고 저 멀리 담장이 교양소를 둘러싸고 있었다. 담장 밖으로는 망망한 들판이 이어졌다.

갑자기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머리 숙여!”

위장복을 입은 사람이 곤봉을 들고 뛰어와 그에게 소리치면서 6대대의 규칙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창밖을 보지 마라!”

장량은 방향감각이 좋아 가는 곳마다 자신의 위치를 알려고 노력했다.

그는 남쪽으로 2㎞ 정도 떨어진 곳에 수용소를 가로지르는 신루(新魯) 고속도로가 있는지도 몰랐다. 고속도로에서 남쪽으로 8㎞ 못 미친 곳으로는 기차가 7분마다 지나간다. 선산(沈山) 철도이자 1907년에 완공된 중국 최초 철도인 경봉(京奉, 北京~奉天)철도이다. 선양에서 베이징 정양문(正陽門)까지 총 862㎞를 지난다. 마싼자 진(鎮)은 바로 이 철도 덕에 선양의 문호로 거듭나면서 동북지방과 관내 각 지역 물자교류에서 반드시 지나야 하는 길목이 되었다.

정부에서 발간한 <마싼자 노동교양소 원지>(이하 <원지>)에 따르면, 마싼자 노동교양소는 ‘新중국 건국 이후 가장 먼저 생긴 노동교양소 중 하나’다. 1957년 설립된 당시만 해도 주변은 분상과 가시나무로 황무지 같은 큰 농장이었다. 저지대라 침수가 잦았기에 현지인들은 ‘하마탕(蛤蟆塘, 개구리 못)’이라 부르기도 했다.

다년간 수감자들의 토지 작업을 통해 지금 교양소의 총면적은 600만 평에 가까워졌다. 노동교양소와 감옥이 점한 토지 외에도 300만 평의 경작지가 있는데 한때 랴오닝성 선양시에서 가장 큰 농산물 경작지였다.

<원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우리는 40년 간의 근면 노동을 통해 곡물 생산 위주의 소형 농장을 농목업과 상공업 위주의 대형 농장으로 발전시켰다. 그 결과, 현재 경작지 156,00묘(畝, 약 314만 평)를 보유하게 됐다.…… 매년 돼지 3만 마리를 출하시킬 수 있는 기계화 양돈장, …… 연간 생산액 1000만 위안의 기계 공장, 연간 의류 생산량 20만 벌의 피복(침구·의복류) 가공공장, 연간 바이주(白酒) 생산량 20톤의 양조장, 그 외에도 자동차 200여 대와 상업무역을 위주로 성장하고 있는 3차 산업 또한 보유하고 있다. 산업 종목이 다양하고 종목마다 연간 총생산액 1억여 위안을 기록할 만큼 규모가 커 성(省) 전체 동종업계에서도 앞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는 성에서 ‘양대 노동’(‘노동 개조’와 ‘노동 교도’를 일컬음) 시스템 총생산액의 1/8, 성 내 18개 노동교양소 기관 총생산액의 1/2을 차지하는 수치로, 성의 양대 노동 사업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4)

1997년 이후 농산물 생산으로 더 이상 수익을 올릴 수 없어 경찰 월급도 지급하지 못하게 되자, 노동교양소는 할 수 없이 일거리를 찾기 시작했다. 수감자들에게 관로 공사, 고철 판매, 쓰레기 분리 일을 시켜봤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1999년이 되서는 전기세조차 내지 못해 파산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보시라이(薄熙來)가 위기의 마싼자를 구했다.

2002년, 보시라이가 랴오닝성 성장이 된 후 감옥 개조에 10억 위안을 투자했다. 들리는 말로는 “마싼자에만 5~6억을 투자했다”고 한다. 시내에 있던 다베이감옥(大北監獄) 등 모든 감옥을 마싼자로 옮겼고, 마싼자는 전국에서 가장 큰 감옥성(城)이 되었다. 보시라이의 이러한 조치로 마싼자 노동교양소 또한 확장되면서 무너져가던 노동교양소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수감자가 적어 농사 일손이 부족했다.”

최근 몇 년간 수감자 수가 늘어나고 남북을 오가는 손님들도 많아지자 장사에도 더 많은 기회가 생겼다.

“여러 택시 운전사들이 그만 두고 유명한 담배나 술을 팔아요.”

“그것은 외지 경찰들에게 선물하려고 사는 거지, 현지인들은 비싸서 사지도 못해요.”

차오라오스(曹老四)가 입담 좋게 말했다. 선양 출신인 차오라오스는 퇴직 후 마싼자에 집을 사서 매일같이 택시운전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 집을 사서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도시보다 훨씬 저렴했다.

그는 손님을 수감자와 면회자, 그리고 수감자를 관리하는 경찰 이렇게 세 부류로 나눴다.

<원지>에 따르면, 마싼자 노동교양소는 국정의 수요에 맞추어 처음에는 모두 국민당 잔당, 반혁명, 반당분자, 반사회주의분자, 우파분자, 착취계급 가정 출신자, 역사적 문제가 있는 사람, 불법 국경 이탈자 등을 수감했다. 이후에는 건달, 절도범, 불법 종사자, 작업 불복종자, 전업 발령 불복종자, 근무지 장기 이탈자까지 이곳으로 보내 교육했다.

차오라오스는 “단속이 심했던 1983년에는 1년에 5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구금됐고 ‘6·4(톈안먼 사건)’때는 ‘동란(動亂) 분자’들도 수감되었다”라고 회상했다.

“지금은 어떤 사람들이 옵니까?”

“모두 죄를 지어서 온 사람들이죠. 마약이나 도박, 성매매, 좀도둑, 폭행, 불법 전매, 음란물 판매(음란 비디오테이프), 다단계도 있어요. 최근 몇 년간 수용소에 오는 사람들이 아주 많아지자 민원도 많이 늘었어요.

참, “파룬궁(法輪功)을 수련하는 사람들도 들어갔는데 풀려나도 또 수련하다가 다시 잡혀 들어가곤 해요.”

5)

‘랴오닝성 사상교육학교’ 현판이 걸려있는 건물 아래에서 차오라오스는 매일 차를 세워두고 손님을 기다린다. 먼지투성이인 거리에서 그의 붉은색 삼륜차(三輪車)는 더욱 눈에 띄었다.

차를 타는 사람들 대부분이 ‘면회자’였기에 차오라오스는 노동교양소까지 10㎞의 길을 매일 여러 번 오가야 했다.

수용소 내부 도로는 마싼자 진의 도로와 다르게 평평하고도 곧게 뻗은 아스팔트였다. 왼편에 제일 먼저 경찰 관사가 나오고 사무실과 푸허(蒲河)공원이 이어졌다. 몇 킬로미터 더 가면 오른쪽에 소년원, 왼쪽에는 여자 수용소가 나온다. 고속도로를 건너 직진하다 보면 남자 제2 수용소가 나오고, 3㎞를 더 가면 남자 제1 수용소,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눈에 띄게 화려한 선양감옥성(沈陽監獄城)이 눈에 보인다.

랴오닝성 마싼자 노동교양소 건물 위치도(저자 제공)

윈자오(雲昭.작가)  

<저작권자 © 에포크타임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마싼자에서_온_편지#마싼자#노동교양소
관련 태그 뉴스
여백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