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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공자 불러내 '공산당' 살리려는 중국(상)
  • 단펑천(撣封塵·중국 자유기고가)
  • 승인 2017.04.21 13:26
베이징의 공자묘(Getty Images)

공자(孔子, BC 551 ~ BC 479)의 이름은 구(丘)로, 자(字)는 중니(仲尼)이다. 노나라 추읍(陬邑, 지금의 산동성 취푸(曲阜) 지역)에서 태어났으며 본적은 송(宋)의 율읍(栗邑, 지금의 허난성 샤이(夏邑)현)이다.

◈ 중국의 성인

공자는 노자에게 가르침을 받은 뒤 14년간 자신의 제자들과 열국을 돌아다니며 인정(仁政) 사상을 설파했다. 만년에는 <시(詩)>, <서(書)>, <예(禮)>, <악(樂)>, <역(易)>, <춘추(春秋)> 등 6권의 경전을 편찬하는 데 집중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는 3천여 명의 제자를 두었으며 그 중 72명이 현인의 반열에 올랐다. 공자의 학설과 사상은 <논어>를 통해 집약되었는데, '인(仁)'을 핵심으로 하여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 등 유가의 정수를 모아놓았다. 중국의 역대 봉건왕조들은 <논어>를 치국(治國)의 경전으로 삼았으며 이를 기초로 국가를 운영했다.

고대 사람들은 공자를 '천종지현(天縱之聖)', '천지목탁(天之木鐸)'이라는 존칭으로 불렀으며 후대의 통치자들은 '지성선사(至聖先師)', '만세사표(萬世師表, 영원한 스승)'로 숭배했다. 또한 공자에게 드리는 제사는 국가장의 최고격인 '대사(大祀)'로 분류되어 치러졌다. 유가사상은 중국 및 전 세계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공자는 '세계 10대 문화명인' 중 첫 번째 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공자 이후 중국 5천년 문명사를 살펴보면, 왕조가 단절되거나 폭군이 등장한 시기는 있었으나 근본적인 정체성을 잃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와 같이 유서 깊은 역사의 도통(道統)이 제대로 계승된 데에는 공자의 역할이 컸다. 그가 없었다면 인류는 온화한 인성과 찬란한 영광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 공자의 무덤을 판 중국 홍위병

'문화대혁명(이하 문혁)'이 시작된 이후 마오쩌둥의 수하였던 캉성(康生)은 베이징 조반파(造反派) 두목인 탄허우란(譚厚蘭)에게 취푸(曲阜)현의 공자묘를 파헤치라고 지시했다. 캉성은 자신이 “사흘 밤낮을 생각하고 나서 이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캉성은 탄허우란에게 자신의 계획을 알리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그곳에 도착하면 무엇이든지 부숴라.”

1966년 11월 7일, 탄허우란은 천안문광장 '인민영웅기념비' 앞에 대중을 집결시켰다. 그리고 '공가점(孔家店, 공자의 유교 사상 전반을 가리킴)'을 파괴할 것을 맹세했다. 200여명의 조반파가 탄허우란을 따라 취푸현에 도착했으며 지역 내 조반파들과 연합했다. '철저한 공가점 파괴를 위한 혁명조반파 연락망'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 뒤 공자묘를 파괴할 만인 대회를 소집했다. 11월 9일에서 12월 7일까지 그들이 파괴한 문물은 6000여개가 넘었다. 공자상(像)이 파괴됐으며 고서 2700여권 및 서화 900여 폭이 불에 탔고 비석 1000여점이 훼손됐다.

그들의 '전적'은 신속히 중앙혁명소조에게 보고됐다. 11월 11일, 당시 중앙문혁소조 조장이었던 천보다(陳伯達)는 곧바로 이와 같은 지시를 내렸다. “공자묘, 공부(孔府), 공자묘지 등은 파손해선 안된다. 그러나 공자의 무덤은 파도 좋다.”

홍위병들은 일제히 '마오쩌둥 어록'을 외면서 공자의 무덤을 파헤쳤다. 신속하게 일을 진행하기 위해 뇌관과 폭약까지 동원됐다. 그들은 공자의 해골을 대중에게 보이고 그 앞에서 불태워 버렸다. 그 유명한 '대성지성선사문선왕(大成至聖先師文宣王)' 비석은 여러 조각으로 박살났다. 그들은 공 씨 후손들의 묘도 같이 훼손했으며 공자의 76대손 연성공(衍聖公, 공자의 적계 후손에게 내려지던 세습봉호) 공령이(孔令貽)의 관을 부수어 유골을 매장하지 않은 채로 두었다.

또한 경학(經學)을 연구하던 저우위퉁(周予同) 교수를 '공가점 파괴' 현장으로 압송했다. 그로 하여금 스스로 공자의 묘를 파도록 시켰던 것이다. 그들은 지방 각급 간부와 함께 1962년 '공자토론회'에 참여했던 학자들을 공자상 주위에서 놀림감이 되게 했다. 그들 스스로 이를 '공로이(孔老二, 공가의 차남)를 위한 장송'이라 칭했다.

조상의 묘가 파헤쳐진 것은 치욕 중의 치욕이 아닐 수 없다. 공자의 77대손 연성공손 공덕성(孔德成)은 이 일로 타이완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중국대륙이 수차례 초청했지만 모두 거절했다. 그는 죽는 한이 있어도 취푸(曲阜)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심지어 베이징에서 '종신 전국정협위원'을 맡고 있는 그의 누이 공덕무(孔德懋)마저 만나지 않겠다고 말했다. 위대한 조상 공자의 묘와 친부모의 묘가 훼손됐지만 최후의 연성공인 공덕성은 중국 당국에게 정중한 사과 한마디 받지 못했다.
 

◈ 공산당의 '비림비공(批林批孔)'

1971년의 '9.13' 린뱌오(林彪) 사건은 중국공산당의 ‘림표(林彪)와 공자(孔子)를 비판한다’는 뜻의 ‘비림비공(批林批孔)’ 운동의 발단이 됐다. 린뱌오의 집을 압수수색할 때 유교경전의 어록집이 발견된 것이 그 원인이었다. 1973년 7월, 마오쩌둥은 왕홍원(王洪文)과 장춘차오(张春桥)에게 “린뱌오는 국민당과 같이 ‘존공반법(尊孔反法, 공자를 존경하며 법가에 반하는)’ 분자 중 한명이다”라고 말했다. 마오쩌둥은 역사적으로 법가를 진보적인 학문, 유교는 퇴보적인 학문으로 받아들였다.

사실 마오쩌둥은 공자에 대해 일찍부터 편견을 갖고 있었다. 1919년 7월, 마오쩌둥은 자신이 편간한 '샹장(湘江) 평론'의 창간호에서 캉유웨이(康有為) 등 '공자를 존경하는' 자들에 대해 폭로한 4편의 글을 실은 바 있었다. 이는 그가 '공자를 비판한' 첫 번째 글이었다. 1966년 12월, 마오쩌둥은 한 외빈에게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의 주요 임무중 하나는 바로 각 방면에서 공자의 영향을 제거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마오쩌둥이 궈모뤄(郭沫若)에게 보낸 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공자학은 명성이 높으나 실제로는 쭉정이나 겨에 지나지 않다.'

1973년 8월 7일, <인민일보>는 중산(中山)대학의 교수 양룽궈(楊榮國)의 <공자, 노예제를 완고히 견지한 사상가> 라는 글을 실었다. 이는 마오쩌둥의 승인 하에 쓰인 글이었다.

1974년 1월 18일, 마오쩌둥은 중앙 1974년 1호 문건으로 장칭(江青)이 주도 편찬한 <린뱌오와 공자, 맹자의 도>를 선정했다. 이로써 중국 전역에는 '비림비공'의 바람이 불어 닥쳤다.

공산당이 배포한 선전자료 중에는 공자의 '극기복례(克己復禮, 자기의 욕심을 누르고 예의범절을 따름)'를 대대적으로 모독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필자의 고향은 허베이(河北)이다. 필자는 비림비공 시기에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한번은 학교에서 '비림비공' 대회를 소집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강단에 올라 발언을 하고 타유시(打油詩, 韻律에 구애받지 않는 통속적인 해학시) 몇 구절을 외웠다. 지금 그 때를 되돌아보면 성현 공자에게 참으로 죄송한 마음밖에 들지 않는다. 필자는 마을의 한 화가가 마을 사거리의 벽 사방에 공산당의 공자모독 포스터를 본 떠 그려놓았던 것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림 속 공자의 모습은 과장되고 추했다.

'비공(批孔)'의 황당무계함은 많은 해프닝을 만들기도 했다. 당시 사람들은 공자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기에 어떤 단체들이 중학교 교사를 초청해 사람들이 '공로이(孔老二)'를 비판하도록 선동했다. 중화민족의 성인은 이렇게 폭도정치 시기에, 공산당에 미혹된 민중들에 의해, '입에 오르내리는 광대'로 전락하고 말았다.

 

단펑천(撣封塵·중국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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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공산당#공자학원#취푸#공가점#홍위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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