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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국민배우 안성기, ‘상선약수(上善若水)’의 삶
  • 이지성 기자
  • 승인 2016.04.19 14:18
안성기는 국민배우라는 화려한 삶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을 내세우는 법이 없었다. 그저 ‘감사함’으로 모든 말을 대신했다. (전경림 기자) 안성기는 국민배우라는 화려한 삶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을 내세우는 법이 없었다. 그저 ‘감사함’으로 모든 말을 대신했다. (전경림 기자)

“상대방을 나와 똑같이 생각하면 그게 ‘배려’ 아니겠어요?”

 

항해하는 사람이 항상 북극성을 지켜보듯이 우리는 마음의 북극성에 의해서만 방향감각을 유지할 수 있다. 마음의 북극성은 평생 동안 우리의 길을 가리켜주기에 충분한 지표가 될 것이다. 우리는 일정한 시일 안에 항구에 도착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 북극성을 잃지 않는다면 올바른 진로에서 벗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배우 안성기. 그는 다사다난한 연예계에서 스캔들 한번 없이 오랜 시간 국민배우의 삶을 살아오고 있었다. 그의 대배우로서의 삶은 단순히 운이 좋아서는 아니었다. ‘배우’라는 마음 속 북극성을 간직한 채 정직하고 성실하게 그 길을 향해 살아온 결과가 지금의 모습이었다.

시종일관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배우 안성기를 보며 ‘참 물 흐르듯 살아온 사람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욕심내지 않았다. 욕심이라면 “영화를 죽을 때까지 잘 해야 겠다”는 욕심 밖에 없다고 했다. 그 욕심에 다른 욕심은 다 묻혔다고. 하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 하나를 가지면 다른 하나를 더 가지고 싶은 게 흔한 사람 마음인데.

 

상선약수(上善若水)의 삶

지극히 착한 것은 물과 같다고 했다. 넘침도 부족함도 없이, 멈춘 듯 끊임없이 흐르는 고요한 강물처럼 그는 평생 배우의 삶을 살아왔다. 아역배우를 시작으로 연예계에 발을 들인 안성기는 아역으로만 7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59년 ‘10대의 반항’으로 7살의 나이에 샌프란시스코 영화제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후 고등학교와 대학교 진학, 군(ROTC) 생활 등으로 약 10여년의 공백기를 가진 뒤 77년 ‘병사와 아가씨들’로 성인 연기자로 다시 컴백했다. 잠깐의 무명생활을 거쳐 80년 ‘바람불어 좋은 날’로 대종상 신인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 81년 ‘만다라’로 백상예술대상 남자연기상, 82년 ‘철인들’로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등 영화계의 굵직한 상들을 수차례 수상하며 국민들에게 가장 사랑 받는 ‘국민배우’로 거듭났다.

국민배우라는 화려한 삶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을 내세우는 법이 없었다. 그저 ‘감사함’으로 모든 말을 대신했다. 배우의 삶이 주어진 것도, 나아가 배우로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것도 그저 ‘감사하다’는 것이었다. 무엇이 되고자 애쓰지 않았다. 그저 한편 한편의 영화를 소중히 여기고, 최선을 다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그는 국민배우가 되어 있었다.

“잠시 시련도 있었어요. 주연만 맡다가 나이가 들자 비중이 작은 조연 역이 들어오기 시작하더군요. 처음엔 마음이 불편했지만 곧 그 흐름을 순순히 따르기로 했습니다. 여유 있는 시간에는 작품 속 캐릭터에 대해 더 연구하고 성찰하기도 했고요. 그러다 보니 배우로서 캐릭터를 찾는데 집중하게 되고 오히려 삶이 더 성숙되더군요. 이런 모습이 수련이 되는 과정이 아니겠어요?“

그래서 일까. 안성기와 호형호제 했던 故최인호 작가는 그를 두고 “너는 꼭 신부 같다”고 했다. 남들은 애써 절제해야 하는 일도 그는 쉽게 절제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게 어렸을 때부터 가정에서 보고 자란 배경 덕분이라고 했다. 특히 모든 일에 감사함을 먼저 찾고, 그 마음으로 삶을 대했던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고.

“어머니는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른 이들을 대했어요. 감성이 그랬어요. 자신보다 남을 더 배려했죠. 그래서인지 저는 배려라는 단어를 좋아해요. 배려만 하면 이 사회도 더 좋아지고, 더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하죠. 저는 상대방을 나와 똑같이 생각해요. 상대가 높거나 낮거나에 관계없이 상대를 한 인간으로써 대하는 마음이 거의 한결 같죠. 그게 배려고요.”

2003년 강우석 감독의 영화 ‘실미도’에서 안성기는 김재현 준위 역을 연기했다. (CJ엔터네인먼트 제공) 2003년 강우석 감독의 영화 ‘실미도’에서 안성기는 김재현 준위 역을 연기했다. (CJ엔터네인먼트 제공)

중용의 삶

그는 넘치는 법이 없었다. 성인배우가 된 이후 영화도 꼭 한 편씩 집중해서 찍었고, 더 욕심내지 않았다. 문화예술인들이 겪을 법한 슬럼프도 거의 없었다. 대신 그에게는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관점이 있다.

“아역배우 하다가 나중에 성인배우로 다시 들어설 때, 잠깐의 무명시절이 슬럼프라고 생각하면 슬럼프인데 생각해 보면 아니에요. 오히려 남들이 이야기하는 슬럼프라는 시간을 저는 정말 좋게 생각하죠. 다시 도약하는 시간으로 만들 수 있으니까요”

그의 말대로다. 그는 아무도 그를 주목하지 않던 무명시절 매일 저녁 시나리오를 쓰며 캐릭터를 연구했고, 배우가 되기 위한 모든 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후 국민배우의 자리에 오른 뒤에도 그의 ‘늘 준비하는 습관’은 계속됐다. 지금도 그는 “연출자가 요구하는 모든 걸 해낼 수 있는 몸을 만들기 위해 꾸준히 운동”을 한다. 취미생활에 깊이 빠지지도 않는다. 늘 절제하며, 자기관리에 철저하다. 그 꾸준함만큼 어려운 게 또 있을까.

“저는 영화로 승부를 건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영화 이외의 일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줄였어요. 심지어 사람 관계도 다 줄였죠. 제 위에 선배들을 보면 동시에 여러 편의 영화를 찍기도 했고, 시간이 정말 없었어요. 그래서 저는 한 번에 한 편의 영화에만 전념하기로 결심했죠. 사람이 바빠지면 순발력만 앞세워 상식적인 선에서 머물게 되는데, 그러면 배우로서 성찰할 시간이 없어지죠. 인간적인 성숙이 뒷받침 돼야 좋은 배우가 될 수 있거든요. 그러려면 자기 시간이 필요하고요. 그때 주변에서 ‘너만 살겠다는 거냐’는 원성도 들었지만 그걸 계속 견지했고, 지금은 한 편만 찍는 것이 영화계에서 자리 잡혔죠. 어쨌든 영화 하나로 잘 해야겠다고 마음먹으니까 다른 데 신경 쓸 시간이 없었어요(웃음).”

그는 자신의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쉽게 휩쓸리지 않았고, 치우치지 않았다. 작품을 고를 때도, 영화를 찍을 때도 그는 늘 “이 작품과 내 연기가 사람들에게 어떤 감동을 주고, 사회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를 고민했다.

“70년 대 후반에 영화를 시작할 때 한국영화의 환경이 굉장히 안 좋았어요. 유신 시절을 겪었기 때문에 굉장히 독재가 심했죠. 정부가 표현의 자유를 제한했고, 검열을 많이 당했어요. 특히 직접적으로 표현되는 영화는 더 심했죠. 그래서 70년대에는 영화를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지 못했어요. 정책적으로 반공이나 새마을 영화, 멜로드라마 같은 것만 주로 만들었던 때죠. 그래서 사람들은 영화를 좀 이상한 사람들이 하는 거라는 인식이 많았어요. 의식 있는 영화인들은 그런 것 밖에 못 만든다는 생각에 자괴감이 많았고요. 나는 이 일을 평생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정말 존경 받는 영화인이 되고 싶었죠. 지금은 배우가 환영받지만, 그때만 해도 분위기가 안 그랬거든요. 80년 대 박정희 대통령이 죽고 나서 사회가 바뀌기 시작했고, 이후 저는 현실성 있고, 사회성 있는 영화만 찾아 작업을 했죠. 문제의식을 가지고, 그것을 반영할 수 있는 영화를요. 그래서 인관관계나 출연료 때문에 움직이진 않았어요. 영화인과 영화가 존중받는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제 나름대로 상당히 노력을 많이 해 온 거죠.”

영화 ‘묵공’(2006)은 한국과 홍콩 합작영화로 안성기와 유덕화가 주연을 맡았다. (CJ엔터네인먼트 제공) 영화 ‘묵공’(2006)은 한국과 홍콩 합작영화로 안성기와 유덕화가 주연을 맡았다. (CJ엔터네인먼트 제공)

한류 속 한국영화 그리고 길

배우 안성기는 오롯이 배우의 길을 걸었지만 연기만 한 건 아니다. 그는 ‘스크린쿼터제 폐지 반대 운동’부터 ‘굿다운로더 캠페인’ 등 영화계 발전을 위해 앞장서 온 사람이었다. ‘배려’라는 그의 원칙에 부합하는 길이었다. 지금도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로서 예술인재 육성 및 지원 사업을 주도해 왔다. 그러다 보니 청소년들에게 귀감을 주는 문화예술인들의 삶을 소개하는 ‘인터뷰365’ 매체의 발행인 겸 대표까지 맡게 된 일복 많은 그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92년 유니세프 특별대표로 임명돼 현재까지 유니세프한국위원회 친선대사로 활발하게 활동하며, 많은 나라의 아이들을 돕고 있다.

그의 역할은 모두가 주어진 것들이었다. 그가 ‘배우’라는 북극성을 가슴에 품고 열정의 배에 올라 항해를 하다 보니 어느새 나눔의 바다를 순항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류 속 한국영화에 대한 주제에 대해 그는 “드라마나 K-POP이 한류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영화는 비교적 차분하게 진행되고 있다”며 “동아시아에서는 한류 층이 넓지만, 아직 세계를 이야기하기에는 갈 길이 많을 거 같다”고 했다.

“한류는 이제 시작이라고 볼 수 있을 거 같아요. 우리가 가난하다가 소득이 높아지면서 많은 재능들이 피어나고 있어요. 원래 한국인이 골프나 양궁, 노래나 춤 등 재능이 참 많잖아요. 흥도 굉장히 많고요. 연기자들을 보면 동양에서는 한국이 제일 잘 하는 거 같아요. 그래서 단순한 한류가 아니라 우리의 대중문화가 외국에 정착되는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해요. 문제는 컨텐츠인데, 그것만 잘 받쳐주면 세계인의 사랑을 받지 않을까요?”

오는 6월이면 안성기 주연의 ‘사냥’이라는 영화가 개봉한다. 액션이 많단다. 그의 말 대로면 “거의 산에서 계속 뛰어다니는 그런 영화”라고.

“액션을 직접 소화했어요. 좀 무리했는지 목 디스크가 생겼죠. 그것 때문에 조금 힘들긴 한데, 배우의 역할이 그런 거죠(웃음). 앞으로의 꿈이라면 배우의 정년을 늘리는 본보기가 되는 겁니다. 한국은 나이가 들면 배우도 감독도 서서히 사라져 가는데, 나이가 들수록 더 깊이가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배우가 지닌 매력을 계속 유지해서 관객들이 스크린에서 또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도록 노력도 해야겠죠. 어쨌든 제가 오랫동안 활동하면 그것이 곧 한국영화계를 위한 기여라고 생각해요(웃음).”

배우 안성기. 그는 한국영화사의 산 역사였다. 그리고 앞으로의 그의 걸음이 곧 한국영화사의 새로운 역사가 될 것이다. 아직도 그의 앞날이 기대되는 건 그가 걸어왔던 길이 너무 성실했기에 그가 걸어갈 길 또한 눈에 선하다는 것이다. 그의 매력을 담아낸 다음 작품을 기대해 본다.

이지성 기자  valor09@epoch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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