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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원로영화인 신영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해”
  • 변홍 기자
  • 승인 2016.03.14 15:51
원로 배우 신영균은 우리 영화를 보이지 않게 큰 힘으로 버티어주는 뿌리였다. (전경림 기자) 원로 배우 신영균은 우리 영화를 보이지 않게 큰 힘으로 버티어주는 뿌리였다. (전경림 기자)

시대를 풍미했던 배우는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과거의 영화(榮華)로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부드럽고 인자한 풍모는 평탄했던 인생을, 몸에 깊숙이 배인 배려는 대인(大人)의 도리를 말해주는 듯 했다. 원로 영화인 신영균(80)은 그랬다. 쉽게 흔들리지 않는 신중함은 거목(巨木)이요, 우리 영화를 보이지 않게 가장 큰 힘으로 버티어주는 뿌리였다.



영화로 살다

2019년이면 우리나라 영화 역사가 100년이다. 일제 강점기 1920년대 나원규의 <아리랑>으로 시작된 우리 영화는 <성춘향> <연산군> 등으로 컬러 시대를 연 신상옥 감독을 거치면서 영화산업에 대한 관심과 대중의 관심도 늘었다. 배우 신영균 역시 1960년 영화 <과부>로 데뷔한 이래 30년간 출연한 영화는 무려 294편. <마부> <상록수> <연산군> <빨간 마후라> <미워도 다시 한 번> 등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영화 역사의 산 증인이었다. 특히 <빨간 마후라>는 중국에서 인기가 높아 아시아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의 영광을 안기도 했다.

신영균이 출연한 1968년 시리즈 멜로영화 은 당시 홍콩 대만 등지로 수출되며 동남아시아에서 인기 몰이를 했다. (Daum.net) 신영균이 출연한 1968년 시리즈 멜로영화 <미워도 다시 한 번>은 당시 홍콩 대만 등지로 수출되며 동남아시아에서 인기 몰이를 했다. (Daum.net)

또 그는 한류의 원조이기도 하다. 1968년 시리즈 멜로영화 <미워도 다시 한 번>은 대만과 홍콩으로 수출돼 인기 몰이를 하며 해외 팬들의 눈물을 쏟게 했고, 홍콩과 합작한 영화인 <달기>에서 당대 홍콩 국민 여배우 린따이(林黛)와 연기했다.

신영균은 한류의 원조로 당대 최고의 홍콩 국민 여배우 린따이와 홍콩과 합작한 영화인 <달기>를 찍었다. 사진은 <달기>의 한 장면.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제공) 신영균은 한류의 원조로 당대 최고의 홍콩 국민 여배우 린따이와 홍콩과 합작한 영화인 <달기>를 찍었다. 사진은 <달기>의 한 장면.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제공)

그러나 그에게 가장 애착이 가는 영화는 바로 <연산군>이다. 그는 이 작품으로 당대 최고 스타의 자리에 올랐고, 제1회 대종상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탔다.

“당시 영화산업은 기업이 아니었고 영세했기 때문에 억지로 출연한 작품도 있었죠. 하지만, <연산군>은 내가 하고 싶었습니다. 사실 연산군은 폭군이었죠. 하지만, 사실 어머니 원수를 갚기 위해 폭군이 된 거잖아요? 인간미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하고 싶었죠.”

잠재된 끼와 남자다운 호방한 성격이 <연산군>에서 빛을 발한 것이다. 그는 “내 마음대로, 오버액션도 하고, 내 액션에 맞춰서 카메라가 따라가곤 했다”고 회상했다. 이후로도 그는 주로 사극에 출연하면서 신영균 만의 색깔을 만들어갔다.

신영균_연산군w



영화처럼 살다

신영균은 비교적 늦은 나이인 서른둘에 배우가 됐다. 배우로 활동하기 전 그는 서울대 치대 출신 개원의였다. 지금의 아내를 만난 것도 해군 군의관으로 진해에서 근무할 때였고, 군의관을 마친 후 1958년 동남치과를 개원해 2년간 치과의사로 지냈다.

하지만, 그의 내면은 늘 연기에 대한 열망이 살아 있었다. 초등학생 때 연극이 너무 보고 싶어 몰래 극장에 가서 구경하고, 새벽이면 산에 올라가서 발성연습을 했다. 고등학교 때 연극배우가 되겠다고 생각해 졸업 후 2년간 연극만 하다, 뒤늦게 입학한 대학에서도 교내 연극회를 조직해 연극을 했다. 치과병원에서 환자를 보면서도 늘 연극이 하고 싶었다.

“환자만 보니 답답했죠. 그런데 때마침 영화감독이 찾아와서 영화 출연을 권유해서 ‘작품만 좋으면 출연하겠다’고 했습니다. 당시 황순원 원작 ‘과부’라는 영화가 있었는데, 머슴 역할을 제안했고. 헌데, 머리를 깎아야 한다는 겁니다. 환자 보는 의사였는데 머리를 깎아야 한다니 아내도 반대를 많이 했고. 아내는 ‘내가 치과의사인 줄 알고 결혼했는데, 무엇 때문에 치과의사를 버리고 영화배우를 하려고 하느냐? 혹시 당신 바람 피우려고 그러는 것 아니냐? 이렇게 반대를 했죠.”

진심이 통했을까. “가정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그의 굳은 맹세로 아내는 마음을 돌렸다. 그후 전폭적으로 도와주는 지원군이 된 아내는 남편이 촬영으로 바쁘게 지낼 때, 매니저가 되었고, 명보극장 바로 옆 명보제과를 인수한 후에는 직접 빵을 굽고 운영하며 재산을 모았다.

원로 영화배우 신영균. (전경림 기자) 원로 영화배우 신영균. (전경림 기자)

영화에 바치다

의사 뿐만이 아니다. 그는 정치인이었고 영화협회 회장도 두 번, 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도 세 번이나 했다. 하지만, 개인의 영달만을 위한 일이 아니었다. 사업이나 정치 모두 영화를 위해서였다. 예술가들의 자녀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한 신영균예술문화재단을 세운 것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6년 전인 2010년에는 문화예술계 발전을 위해 서울 중구 초동 명보극장(명보아트홀)과 국내 최초, 최대의 영화 박물관인 제주 신영영화박물관을 기증하기도 했다. 명보극장은 그가 재산 목록 1호로 생각하며 아껴온 500억 상당의 부동산. 그는 명보극장에 대해 “우리나라 영화 역사에 남는 극장으로, 영화가 시작됐던 충무로에 지금까지 유일하게 남아있는 극장”이라고 말했다.

“우리 후배들에게 좋은 일을 하고 가야겠다고 생각했기에, 가장 아끼던 것을 기증하기로 생각한 겁니다. 명보극장은 내가 제일 아끼던 재산이었는데, 내가 기증하자고도 했지만, 가족들 역시 기증하기를 권했습니다.”

원로배우 신영균은 “우리나라에는 좋은 인재가 많다”면서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다보면 앞으로 더 발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열심히 노력하라’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평범한 말. 하지만, 그는 ‘열심히’ 살아온 그의 인생에 느낌표를 다는 듯 했다.

그는 “영화는 자연과 가까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영화를 보면 인간의 삶을 자연스럽게 그려내는 매력이 있다”면서 “우리나라도 머지않아 미국처럼 인정받아서 투자가들이 영화에 많이 투자를 할 것”으로 내다봤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시상하는 것도 좋지만, 이제는 우리가 수상할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인정받기 시작하면 한국영화는 무섭게 발전할 것이다.”

인터뷰를 진행한 강동구 고덕동 ‘Stage28’ 카페가 있는 터는 그가 이전에 살았던 곳으로, 지금도 손수 가꾼 정원엔 그가 심어놓은 나무가 그대로 있다. 그가 하나하나 정성으로 심은 나무처럼, 작은 것 하나에도 소홀하지 않는 신영균. 그의 남은 소중한 행보가 기대된다.

변홍 기자  bianmei@epoch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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