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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평 중국 공산당의 민족문화 파괴
  • 중국부
  • 승인 2014.09.09 06:00

들어가는 말


문화란 한 민족의 영혼(靈魂)으로서 종족, 토지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정신요소이다.
한 민족의 문명사는 바로 그 민족의 문화(文化)발전사이며, 민족문화의 철저한 훼멸은 곧 한 민족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류역사상 휘황한 문명을 창조했던 유구한 민족들은, 비록 인종이 여전히 남아있을지라도, 전통문화의 소실과 함께 민족은 완전히 소멸된 것이다. 중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5천년의 오랜 문명을 연속하여 이어온 나라로서, 그 문화에 대한 파괴는 곧 용서할 수 없는 죄악임에 틀림없다.

반고(盤古)의 천지개벽’, ‘여와(女媧)의 사람 만들기’, ‘신농(神農)이 백가지 풀을 맛보고’, ‘창힐(倉頡)이 문자를 만든 것’은 신(神)이 전한 문화의 시작이었다. ‘인법지(人法地), 지법천(地法天), 천법도(天法道), 도법자연(道法自然)’이란 도가의 천인합일(天人合一) 사상이 문화의 혈맥에 스며들었고, ‘대학(大學)의 도(道)는 밝은 덕을 분명히 하는데 있다(大學之道,在明明德)’라고 하면서 공자는 2천년 전에 서당을 만들어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리하여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을 대표로 하는 유교사상이 사회에 전해지기 시작했다. 서기 1세기 ‘자비로 널리 제도한다(慈悲普度)’는 석가모니의 불법(佛法)이 동(東)으로 전해지면서 중국문화는 더욱 박대정심(博大精深)하게 되었다. 유(儒), 불(佛), 도(道) 삼가(三家)의 사상은 서로 어우러져 빛을 발하여, 성당(盛唐)시기에는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찬란한 문명의 절정에 달하였다.

비록 중국민족은 역사상 여러 차례 파괴와 타격을 받아왔지만, 중국 전통문화는 줄곧 지극히 거대한 용합력(容合力)과 생명력을 표현해 왔고, 그 정화(精華)는 줄곧 유전되어 내려왔다. ‘천인합일’은 조상들의 우주관을 대표하며, ‘선악에는 보응이 있다’는 말은 사회적인 상식이며,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말라(己所不欲,勿施於人)’는 사상은 사람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미덕을 나타내며, ‘충효절의(忠孝節義)’는 사람이 처세하는 표준이며,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은 사람과 사회의 도덕을 규범화시키는 기초가 되었다.

이러한 전제하에서 중화문화는 성실, 선량, 화합, 포용 등의 우수한 특징을 체현하게 되었다. 백성들이 모시는 위패의 ‘천지군친사(天地君親師)’는 천지(天地)로 대표되는 신(神)을 공경하고, 임금(君)으로 대표되는 사직(社稷)에 충성하며, 가정(親)을 중히 여기고, 사도(師道)를 존경하는 문화적 내포가 민간에까지 깊이 뿌리내렸음을 잘 반영해주고 있다. 중국의 전통문화는 천인의 조화를 추구하고 개인적인 수양을 중시하였다. 또 유불도(儒彿道) 수련의 신앙을 근본으로 삼았기 때문에, 포용(包容)할 수 있었으며, 발전할 수 있었고, 인간의 도덕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사람에게 올바른 믿음『正信』이 있도록 하였다.

법률과 같은 강제적인 구속과는 달리 문화적인 구속이란 유연한 것이다. 법률이란 죄를 저지른 후의 징벌에 치중하지만, 문화는 도덕적인 교육을 중히 여기면서도 오히려 범죄를 예방하는 작용을 한다. 한 사회의 윤리와 가치관은 흔히 문화를 통해 구체적으로 반영되어 나오기 마련이다.

중국 역사상 전통문화가 전성기에 이른 당조(唐朝)는 바로 중국의 국력이 전성기를 이룬 시기였으며, 과학도 이로 말미암아 세계적으로 가장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 당시 유럽, 중동, 일본 등 여러 나라에서 모두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長安)으로 사람을 파견하여 당나라 문화와 과학을 배우게 하였다. 주변 국가들은 중국을 종주국으로 여겼고 수많은 나라들이 당나라에 조공(朝貢)을 바쳤으며, 당나라 문화를 번역하는 것을 중시하였다.

진(秦)나라 이후 중국은 수(隨), 당(唐), 원(元), 청(淸) 왕조와 기타 소수민족이 할거한 왕조를 포함해서 흔히 소수민족에게 점령당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거의 모두 한족에 동화(漢化)되었는데, 이는 중국 전통문화의 거대한 동화력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공자가 말한 ‘먼 곳의 사람들이 불복할 경우 학문과 덕을 닦으면 자연히 오게 된다.’는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1949년 정권을 찬탈한 이후 국력을 기울여 민족문화를 파괴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절대로 공산당이 산업화에 열광하거나 또는 서양문화에 치우치려고 해서 나타난 일부 어리석은 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공산당의 의식형태가 민족의 전통문화와는 마치 물과 불처럼 너무나 이질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민족문화에 대한 공산당의 파괴는 조직적, 계획적, 체계적이었으며 아울러 국가폭력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공산당은 설립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중국문화에 대한 ‘혁명(革命)’을 여태껏 멈춘 적이 없으며 또한 확실하고도 철저하게 중국문화의 ‘생명(命)’을 제거(革)하려고 시도해 왔다.

더욱 악랄한 것은 전통문화에 대하여 중국 공산당이 줄곧 바꿔치기를 해 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고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전통문화를 이탈한 후에 생긴 궁중(宮中) 암투, 권모술수, 독재정치 등등을 ‘더욱 널리 확대 발전(發揚光大)’시켰으며, 공산당의 일련의 선악 표준, 사유방식과 언어 시스템을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 ‘당(黨)문화’만이 비로소 전통문화의 계승으로 여기게끔 만들었다. 심지어 ‘당문화’에 대한 사람들의 반감을 이용하여 사람들이 앞장서서 중국의 진정한 전통문화를 저버리게 하였다.
결과적으로 이는 중국에 재앙을 초래하였다. 사람들은 단지 마음속에서 도덕적 구속력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 공산당의 사악한 학설까지 주입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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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은 왜 민족문화를 파괴해야만 하는가?


(1) 중국의 유구한 전통문화는 신앙과 도덕이 근본

중국인의 진정한 문화는 5천년 전에 황제(黃帝)가 창립한 것이다. 때문에 황제(黃帝)를 ‘인문초조(人文初祖)’라고 한다. 실제상 황제는 또한 중국 도가사상의 창시인이다. 유가사상은 도가사상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이런 까닭에 공자는 ‘도에 뜻을 두고, 덕에 근거하며, 인에 의지하고, 예에서 거닌다.(志於道,據於德,依於仁,遊於藝,『논어』 술이[述而] 제7편)’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夕死可矣,『논어』 이인[里仁] 제4편)’라고 했던 것이다. 천지, 음양, 우주, 사회와 인생의 법칙을 기술(記述)한 『주역』을 유가에서는 ‘모든 경전의 으뜸’이라고 떠받들고 있는데, 그 중의 예측학은 현대과학마저도 따라가기 힘들 정도이다. 한편 불가(佛家)사상, 특히 선종(禪宗) 사상은 지식인들에게 은연중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유가사상은 전통문화 중 ‘입세(入世)’부분으로서 가족윤리를 중요시한다. 그중에서도 ‘효(孝)’는 아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백가지 선(善) 중에 효가 으뜸이다(百善孝爲先)’라고 주장한다. 공자는 ‘인·의·예·지·신’을 제창했지만 또한 ‘효도하고 공경하는 그것이 바로 인(仁)의 근본이 아니겠느냐? (孝悌也者,其為仁之本歟?)’라고 말한 적이 있다.

가족윤리는 자연스럽게 사회윤리로 확대될 수 있는데 ‘효(孝)’를 위로 연장시키면 군주에 대한 신하의 ‘충(忠)’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을 대함에 있어 공경하고 화목하게 지내는 자가 윗사람을 배신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其爲人也孝弟,而好犯上者,鮮矣."『논어』 학이[學而] 제1편)’란 말이 있다. 공경할 ‘제(悌)’는 본래 형제간의 관계를 말하는 것으로, 횡적으로 뻗어나가면 친구 사이의 ‘의(義)’가 될 수 있다. 유가는 가족 중에서 부모는 자애롭고『父慈』, 자식은 효도하며『子孝』, 형은 동생에게 우애가 있고『兄友』, 아우는 형을 공경할 것『弟恭』을 제창한다. 그중 ‘자애『慈』’를 아래로 연장시키면 신하에 대한 군주의 ‘인(仁)’이 될 수 있다. 오로지 가족 중에서 전통이 유지된다면 사회윤리 역시 자연히 유지될 것이며 ‘몸을 닦고, 집안을 다스리고,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할(주석보기)’ 수 있다.

불가와 도가사상은 전통문화 중에서 ‘출세(出世)’한 부분이다. 일반 민중들의 생활에 대한 불도(佛道)의 영향은 없는 곳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도가사상과 연원이 깊은 한의, 기공, 풍수, 점치기 및 불가의 천국과 지옥, 선악에는 보응이 있다는 등의 사상과 유가윤리는 중국전통문화의 핵심을 구성하였다.

유(儒), 불(佛), 도(道) 3가지 신앙은 중국인에게 한 세트의 아주 안정한 도덕체계를 수립해 주었으니, 이른바 ‘하늘이 변치 않는 한 도(道) 역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한 세트의 도덕체계는 사회가 존재하고 안정 및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기초가 되었다.
정신적 층면(層面)에 속한 도덕은 흔히 추상적이다. 그러나 문화의 중요한 한 가지 작용이라면 바로 도덕체계를 통속적으로 표현하는데 있다.

중국의 4대 명작을 예로 든다면, 『서유기(西遊記)』는 그 자체가 바로 신화(神話)이고, 『홍루몽(紅樓夢)』 첫 편에 등장는 대황산 무계절벽의 공공대사(空空大士), 묘묘진인(渺渺眞人)과 통영보옥(通靈寶玉)과의 대화와 신화(神話)는 『홍루몽』을 관통시키는 실마리가 되었다. 또 『수호전(水滸傳)』 첫 편에 나오는 ‘홍태위가 요괴에게 잘못 걸려들다(洪太尉誤走妖邪)’란 단락은 양산박 108명 장수의 내력에 대한 신화이고, 『삼국지(三國誌)』는 자연 재해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분분한 세상사 끝이 없어도 천수(天數)는 망망하여 벗어나지 못하네.’라는 천명관(天命觀)으로 마무리 짓는다. 또한 『동주열국지(東周列國誌)』 혹은 『설악전전(說岳全傳)』도 다 유사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것은 절대로 소설가들의 창작과정에서 나타난 우연한 일치가 아니며 자연계 및 인생에 대한 중국 지식인들의 기본적인 견해였다. 이들의 문화작품은 후세 사람들에게 대단히 깊은 영향을 남겨 주었다. 그러므로 중국인들이 ‘의(義)’를 언급할 때 흔히 단순하게 하나의 개념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며, 관우(關羽)라는 ‘의박운천(義薄雲天)’의 인물이 ‘토산에 갇혀 3가지 일을 약속하고’, ‘백마(白馬)의 포위’와 ‘다섯 관문을 지나고 여섯 장수의 목을 베며’, ‘화용도(華容道)’에서 최후에 맥성(麥城)에서 패배하기까지 ‘의리와 절개를 지키고 부자(父子)가 모두 신(神)으로 되었다’는 등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충(忠)’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면 자연히 악비의 ‘정충보국(精忠報國)’을 연상하거나, 혹은 제갈공명의 ‘나라를 위하여 전력을 다 바쳐 죽을 때까지 그치지 않는다.
‘충의(忠義)’에 대한 전통적 가치관의 찬미는 이렇듯 지식인들의 창작에 의해 다채롭고 생생하기 그지없는 이야기로 독자들 앞에 펼쳐졌다. 다시 말해서 추상적인 도덕설교가 문화적인 방식으로 구체화되고 형상화 되었던 것이다.

도가는 ‘진(眞)’을 주장하고, 불가는 ‘선(善)’을 주장하며, 유가는 ‘충서(忠恕)’와 ‘인의(仁義)’ 및 ‘겉으로 형상은 달라도 안으로 성리(性理)의 동일함을 실증하나니......사람들과 더불어 선(善)으로 돌아가고자 함’을 주장한다. 이것이야말로 ‘유불도’신앙을 근본으로 하는 전통문화의 가장 가치 있는 부분이다.

전통문화 중에는 ‘천(天), 도(道), 신(神), 불(佛), 명(命), 연(緣),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 염(廉), 치(恥), 충(忠), 효(孝), 절(節)’ 등이 관통되어 있다. 아마 많은 사람이 일생토록 일자무식(一字無識)일 수도 있지만, 전통연극과 평서(評書)에 대해서는 익숙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화형식은 모두 민간 백성들이 전통적 가치관을 얻는데 있어 중요한 경로가 된다. 때문에 중국 공산당의 전통문화 파괴는 곧바로 중국의 도덕을 직접 망가뜨리는 것이며, 사회안정과 상화(祥和)한 기초를 파괴하는 것이다.
(2) 공산당 사설(邪說)과 전통문화의 대립

공산당 ‘철학’은 중국의 진정한 전통문화와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전통문화는 천명(天命)을 경외(敬畏)하는 것이다. 공자는 “생사는 명에 달렸고 부귀는 하늘에 달렸다.” 라고 여겼다. 불가와 도가사상도 모두 유신론(有神論)이다. 그러므로 생사윤회와 선악에는 보응이 있음을 믿는다.

그러나 공산당은 비단 ‘무신론(無神論)’을 신봉할 뿐만 아니라 ‘무법무천(無法無天)’이다. 유가는 가정을 중요시하나 『공산당 선언』 중에서는 ‘가정의 소멸’을 명확하게 표시하였고, 전통문화는 ‘명이하지변(明夷夏之辨)’이나 『공산당 선언』은 ‘민족의 소멸’을 고취시켰고, 유가문화는 ‘인자애인(仁者愛人)’를 중요시하나 공산당은 계급투쟁을 주장했으며, 유가는 임금에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할 것을 주장하나 『공산당 선언』은 오히려 ‘조국의 소멸’을 제창했다.

공산당이 중국에서 정권을 탈취하고 공고하게 하려면 반드시 인륜을 부패시키는 사상이 중국에서 먼저 자리 잡아야만 했다. 마치 마오쩌둥이 말한 것처럼 “무릇 한 정권을 무너뜨리려면 먼저 여론을 조성해야 하며, 의식형태의 작업도 병행해야 한다.” 중국 공산당도 보았다. 순전히 무력에 의해 가까스로 지탱해온 서양사상의 쓰레기인 공산주의 ‘학설’은 5천년 중국역사의 박대정심(博大精深)한 문화와 대응할 방법이 없었다. 그리하여 아예 하는 김에 끝장을 보자는 심사로 중국문화를 철저하게 파괴해야만 마르크스-레닌 ‘주의(主義)’가 중국에서 주도적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음을 보았던 것이다.
(3) 민족문화는 공산당 독재의 걸림돌

마오쩌둥은 전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승려가 우산을 든 것처럼 법도 없고 하늘도 없다(無法無天)!” 민족문화의 존재는 말할 필요도 없이 중국 공산당의 ‘무법무천(無法無天)’에 거대한 걸림돌이었다.

전통문화 중의 ‘충(忠)’은 절대 ‘어리석은 충성’이 아니다. 민중의 눈에 황제는 ‘천자(天子)’이며 그 위에는 또 ‘하늘『天』’이 있다. 황제도 영원히 정확하지는 않은 고로 황제의 과오를 지적할 수 있도록 간관(諫官)을 둘 필요가 있었고 동시에 중국의 역사기록제도는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황제의 일언일행을 기록하도록 하였다. 사대부(士大夫)는 가히 ‘제왕의 스승’이 될 수 있었으며 황제의 잘잘못은 유가 경전으로 가늠하였다. 심지어 임금이 부패하고 극악무도할 때에는 사람들이 일어나 그를 무너뜨릴 수도 있었다.

예컨대 성탕(成湯)의 걸왕(傑王) 토벌과, 무왕(武王)의 주왕(紂王) 토벌 등을 전통문화에 입각해서 본다면 비단 충성스럽지 아니한 것이 아닐뿐더러 오히려 하늘의 뜻에 따라 도(道)를 행한 것이다. 문천상(文天祥)이 남침한 몽고군에게 포로가 된 후 송나라 황제가 친히 나서서 그에게 투항할 것을 권고했지만 문천상은 이를 거절하였다. 왜냐하면 유가는 “귀한 것은 백성이오, 그 다음이 사직(社稷)이고, 임금은 그 다음이다.”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독재적인 중국 공산당은 이 모든 것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왜냐하면 공산당이 원하는 것은 ‘핵심 인물을 신격화시키는 것’이지 그 위에 또 ‘천(天)’, ‘도(道)’, ‘신(神)’ 등이 있으며 이런 전통문화 중의 뿌리 깊은 개념이 그것을 구속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산당은 만약 전통문화의 표준으로 중국 공산당의 일체를 가늠한다면 모두 하늘의 뜻을 어기고 도를 배신한 큰 죄악임을 알고 있었으며, 만약 전통문화가 여전히 존재한다면 인민들은 공산당을 ‘위대하고 영광스럽고 정확한’ 것이라고 칭송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으며, 지식인들은 ‘끝까지 간언(諫言)하고’, ‘사생취의(捨生取義)’하며, ‘정권보다는 백성이 귀하다’는 등의 가치관을 유지하고 공산당의 어용 문인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즉 전 인민의 ‘사상통일’이 불가능함을 알고 있었다.

전통문화 중 천지자연에 대한 경외(敬畏)는 중국 공산당의 ‘천지를 개조하고’ ‘천지와 투쟁한다’는 슬로건에 대한 걸림돌이며, 전통문화 중 ‘인명(人命)은 하늘에 달려있다’는 식의 생명 존중은 중국 공산당의 ‘집단학살’식 테러통치의 걸림돌이며, 전통문화 중 ‘천도(天道)’야말로 도덕과 선악을 가늠하는 최종적 표준이라는 것은 중국 공산당의 도덕에 대한 해석권을 빼앗는 것과 같았다. 그러므로 중국 공산당은 전통문화야말로 공산당이 정권을 유지하는데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인식하였다.
(4) 전통문화는 중공의 집권 합법성에 도전

전통문화 중에는 ‘유신론(有神論)’과 ‘천명론(天命論)’이 포함되어 있다. 만약 ‘천명(天命)’을 승인한다면 곧 자신이 ‘도가 있는 현명한 군주(有道明君)’라는 사실과 ‘하늘의 뜻을 받들어 천명을 받았음’을 입증해야 한다. 또한 만약 ‘유신론’을 승인한다면 곧 ‘왕권은 신(神)이 준 것’임을 승인해야 한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의 집권 이론은 “여태껏 무슨 구세주가 없었으며, 또한 신선(神仙)이나 황제(皇帝)에 의지하지도 않는다. 인류의 행복을 창조하려면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 의거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중국 공산당은 ‘역사적(歷史的) 유물론’의 관점을 선전하며 ‘공산주의’가 ‘인간 천당’이라고 떠들어대면서 ‘인간 천당’으로 가는 길은 바로 ‘프롤레타리아의 선봉대’인 공산당의 영도에 의지해야 한다고 선양(宣揚)해 왔다. 그러므로 유신론을 승인하는 것은 직접적으로 중국 공산당의 집권이 합법적인가에 대한 도전이다.

공산당은 어떻게 전통문화를 파괴했는가?


중국 공산당의 일체는 모두 정치를 위해 일을 하고 있다. 정권을 찬탈하고 자신의 폭정을 유지하며 공고히 하기 위하여, 중국 공산당은 사악한 당성(黨性)으로 인성(人性)을 대체할 필요가 있었으며, ‘거짓, 사악, 투쟁’이란 당(黨)문화로 중국 전통문화를 대체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파괴와 대체는 단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문물 고적과 고대 서적뿐만이 아니며, 더 나아가 인간의 행위, 사상과 생활방식 등 여러 면으로부터 사람들의 전통적인 가치관념, 인생관과 세계관을 개변시켰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문화적으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표상(表象)을 ‘정화(精華)’라고 여기며 보존해 오면서 다시 이러한 이른바 ‘정화’를 표면에 내세우고 뒷면의 내포를 당(黨)문화로 바꿔치기 하였다. 그런 다음 중국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발전시키자’는 허울을 내걸고는 인민과 국제사회를 기만하고 있다.
(1) 3교를 함께 소멸

전통문화는 결국 유, 불, 도 사상을 근본으로 한 까닭에 중국 공산당이 문화를 파괴한 첫 걸음으로 바로 유·불·도 사상이 세간에서 구체적으로 체현된 종교들을 깨끗이 제거하는 일이었다.

3교는 역사적으로 각기 다른 시기에 모두 파괴당한 경험이 있다. 불교를 예로 든다면, 역사상 4차례의 큰 법난(法難)을 겪었는데, 역사학계에서는 이를 ‘삼무일종(三武一宗)’ 멸불(滅佛)이라고 한다. 그러나 북위(北魏 386~534) 태무제(太武帝)와 당(唐, 618~907) 무종(武宗)은 모두 도교를 일으키는 대신 불교는 소멸시켰고, 북주(北周 557~581) 무제(武帝)는 불교와 도교를 함게 소멸시켰으나 유교(儒敎)는 존중하고 숭상했다. 후주(後周)의 세종(世宗)이 불교를 소멸한 것은 단지 불상을 녹여 돈을 만들기 위한 것이며, 유교와 도교는 조금도 다치지 않았다.

그런데 역사상 유독 중국 공산당만은 3교를 함께 소멸시켰다. 중국 공산당은 정권을 잡자마자 사찰을 불태우고 스님이나 비구니를 환속(還俗)하도록 강요했는가 하면, 기타 종교 장소에 대해서도 가차 없이 파괴하였다. 60년대에 이르러 중국의 종교 장소는 이미 몇 곳에 불과했다. 문화혁명 시기 이른바 ‘4가지 낡은 것 타파(破四舊)’는 종교와 문화에 대한 한 차례 대겁난이었다.

예를 들어 말하면, 중국 최초의 불교 사찰인 백마사(白馬寺)는 동한(東漢) 초기에 낙양성 밖에 지은 것으로 중국 불교의 발상지였다. 그러나 ‘4가지 낡은 것 타파’ 시에 당연히 재앙을 피할 수 없었다. “사찰 옆에 백마사 생산대대가 있었는데 당지부 서기가 농민들을 거느리고 백마사에 가서 혁명을 하였다. 결국 어디나 할 것 없이 부수는 바람에 1천여 년 전 요(遼)나라 때 만든 18나한 조각이 훼손되었고 2천여 년 전 인도 고승이 갖고 온 패엽경(貝葉經)이 불타버렸다. 그리고 세상에서 희귀한 보물인 옥마(玉馬)가 산산 조각났다. 몇 년 후, 캄보디아의 해외 망명 군주 노로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가 백마사를 참배하겠다고 신청하자, 당시 중국 총리였던 저우언라이는 급히 베이징 자금성 안에 있던 패엽경과 베이징 근교 향산 벽운사(碧雲寺)의 청나라 시대 18나한을 낙양으로 운송하라고 지시를 내려, 가짜문화재로 대체해 외교적 난제를 해결하였다.(딩수(丁抒)가 쓴 『얼마나 많은 문화재가 불태워졌는가?』중에서 인용)

1966년 5월,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었다. 이 ‘혁명’은 확실히 중국문화의 목을 자른 셈이었다. 그해 8월부터 시작해서 ‘4가지 낡은 것을 타파’하는 뜨거운 불길이 중국 대지를 휩쓸었다. 사찰, 도관(道觀), 불상과 명승고적, 서예와 그림, 골동품은 ‘봉건주의, 부르조아, 수정주의’로 간주되어 즉시 홍위병들의 주요 파괴대상이 되었다. 불상을 예로 든다면, 베이징 이화원(頤和園) 만수산 꼭대기에 유리(琉璃)로 만든 천 개의 불상이 있었는데 ‘4가지 낡은 것을 타파’함을 거쳐 단 하나도 제대로 남기지 못했다. 수도가 이러하거니와 전국 각지 역시 다 이러했다. 심지어 멀리 떨어진 외딴 마을까지도 이런 재앙이 미쳤다. 아래에 이에 대한 한 가지 사례를 보도록 하자.
“산시성(山西省) 다이현(代縣)에 천태사(天臺寺)가 있었는데 1천6백 년 전 북위(北魏) 태연(太延) 년간에 지은 것으로 그곳에 소장된 조각상과 벽화는 그야말로 진귀한 명품이었다. 그곳은 비록 현성과 멀리 떨어져 있었으나 ‘4가지 낡은 것을 타파’하는 자들은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서 조각상이며 벽화를 닥치는 대로 파괴하였다…….

산시성 저우즈현(周至縣) 경내에는 2천5백년 전에 노자가 『도덕경』을 강의하면서 후대에 남겨 준 누관대(樓觀臺)가 있었다……. 노자가 당시 경을 강의한 ‘설경대(說經臺)’를 중심으로 사방 10리 내 50여 곳에 고적이 널려 있었다. 여기에는 당(唐) 고조(高祖) 이연(李淵)이 건립한, 1천3백여 년 역사를 가진 ‘종성궁(宗聖宮)’도 포함되어 있었다. 오늘날 누관대 등 고적들은 모조리 파괴되었고 도사들은 전부 강요에 의해 그곳을 떠나야 했다. 도교의 규정에 따르면 도사들은 출가한 후, 영원히 수염과 머리를 깍지 못한다. 그러나 지금은 강요에 의해 머리를 깎고 도복을 벗었으며 인민공사 사원으로 되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현지 농가의 사위로 변해버렸다…….
산둥(山東)의 노산(_山)은 도가의 성지(聖地)였는데 태평궁, 상청궁, 하청궁, 두무궁, 화엄암, 응진관, 관제묘 등 곳곳의 ‘신상(神像), 공양 그릇, 경서, 문물, 묘비는 몽땅 훼멸당하고 불에 타버렸다.’……

지린(吉林)시 문묘(文廟)는 전국 4대 공자묘 중의 하나였으나 ‘4가지 낡은 것을 타파’하는 중에 심한 훼손을 당했다.”(이상은 모두 딩수(丁抒)가 쓴 『얼마나 많은 문화재가 불태워졌는가?』중에서 인용)
(2) 종교 말살의 특수한 방식

레닌은 “보루(堡壘)는 내부에서부터 공격해 파괴하는 것이 가장 쉽다.”고 말하였다. 중국 공산당은 마르크스-레닌의 후예로서 이 말에 대해 자연히 마음속으로 깨닫고 이해한 바가 있었다.

석가모니부처는『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에서 그가 열반한 후 마왕(魔王)이 승녀, 비구니 남녀 거사(居士)로 환생하여 불법을 파괴하고 교란할 것임을 예언하였다. 우리는 물론 석가모니부처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킨 것인지 검증할 방법이 없지만, 불교에 대한 중국 공산당의 파괴는 확실히 통일전선에서 시작하였으며 일부 출가인들이 시작한 것이었다. 심지어 지하당원을 직접 종교 내부에 침투시켜 파괴시켰다. 문화대혁명 때 한 차례 비판대회에서 중국 불교협회 부회장을 맡은 자오푸추(趙樸初)에게 이렇게 질문한 사람이 있었다. “당신은 공산당원인데 어찌하여 불교를 믿는가?”

석가모니부처는 ‘계(戒)·정(定)·혜(慧)’를 통하여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수련해 냈으며, 열반 전에 자신의 제자들에게 간곡히 가르치기를, “계율을 지켜야 한다. 절대 범(犯)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아울러 “파계(破戒)한 사람은 천(天)용(龍)귀신(鬼神)이 모두 증오한다. 나쁜 소리『惡聲』가 널리 퍼진다 …… 죽으면 곧 지은 업(業)에 따라 지옥의 고통을 받게 된다. 액운을 다 겪고 나서야 지옥에서 헤어나올 수 있는데, 그 다음에는 아귀(餓鬼)나 축생(畜生)의 몸을 반복적으로 받게 된다. 마치 끊임없는 윤회 속에서 해탈할 시기가 없는 것과 같다.”라고 경고하였다.

그러나 이런 불타(佛陀)의 경고는 정치승려들에겐 귓가를 스치는 바람소리에 불과했다. 1952년 중국 대륙에서 ‘중국불교협회’가 설립될 때 중국 공산당은 사람을 파견하여 출석하였고 회의에서 수많은 교도들은 불교의 청규계율(淸規戒律)을 마땅히 폐지해야 한다고 제기하였다. 아울러 이런 전장(典章)은 수많은 청춘 남녀를 해칠 수 있다고 하였다. 더욱이 어떤 사람은 “교를 믿는 것은 자유이므로 승려가 장가들고 비구니가 시집가며 술 마시고 고기 먹는 것도 모두 반드시 자유로워야 하며 누구도 상관할 수 없다.”고 까지 하였다.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허운(虛雲) 법사는 불교가 곧 소멸될 위험에 처한 것을 보고는 일어나서 항변하였으며 계율과 불교복장을 보존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허운법사는 곧 ‘반혁명’으로 몰렸고 방장실에 감금되어 음식물조차 공급받지 못했다. 대소변도 밖으로 내보내지 못하게 하였고 또한 황금, 은, 총을 내놓으라고 명령하였다. 허운 법사가 ‘없다.’고 하자 공산당은 사람을 시켜 잔혹한 구타를 가해 허운 법사의 머리가 터지고 피가 흘렀으며 갈비뼈가 부러졌다. 당시 허운은 이미 112세였다. 군경(軍警)은 그를 평상에서 끌어내려 바닥에 넘어뜨렸다. 이튿날 다시 왔을 때 허운이 아직 죽지 않은 것을 보고 또 다시 악독하게 구타하였다.

1952년에 성립된 중국불교협회와 1957년에 성립된 중국도교협회는 그들의 발기서(發起書)에서 모두 “인민정부의 영도 하에”라고 명확히 표시하였다. 이것은 사실상 ‘무신론’을 주창하는 공산당의 영도 하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동시에 양 교(敎)는 모두 생산건설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정부 정책 등을 실행하겠다고 표시하였다. 완전히 세속화된 조직이 된 것이다. 아울러 정진하며 계율을 지키는 출가인들은 오히려 반혁명분자, 회(會)도(道)문(門)이라는 모자를 씌워 “불교와 도교의 대오를 순정(純淨)하게 하자!”란 혁명구호 하에 구금시키거나 노동 개조시키고 심지어는 처형까지 하였다.

서양에서 전해 온 기독교와 천주교도 불행을 피할 수는 없었다. 1958년 출판한 『중국 공산당은 어떻게 기독교를 박해했는가』 란 책의 통계에 의하면 “문서상으로 폭로된 자료만해도, 대륙의 성직자 중 지주, 악질 토호라는 누명을 쓰고 살해당한 사람의 수가 8840명에 달했다. 그리고 노동개조를 당한 사람이 3만9천200백명에 달했다. 한편, ‘반혁명’이란 누명을 쓰고 살해당한 사람이 2천450명에 달하였으며 이 죄명으로 노동개조당한 사람도 2만4천800백명에 달했다.”

종교는 세속을 벗어나 수행하는 법문으로서 ‘피안(彼岸)’과 ‘천국(天國)’을 중히 여김은 의심할 바가 없다.
석가모니는 전에 인도의 왕자였으나 청정(淸靜) 적멸(寂滅)의 해탈을 위하여 왕위를 포기하고 산림 속에 들어가 힘들게 수행하였다.
예수가 도를 이루기 전에 사탄은 그를 산 위로 데리고 가서, 천하 만국의 영화(榮華)를 보여주며 “네가 만약 나에게 허리를 굽히고 절한다면 나는 이 일체를 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의 통일전선 전술에 말려 든 정치 승려, 정치 목사들은 오히려 ‘인간불교’, ‘종교는 진리이지만 사회주의도 진리이다.’등의 일련의 거짓말과 “이 세상과 저 세상은 모순되지 않는다.”란 말들을 만들어 냈으며 이를 통해 출가인들에게 현세(現世)의 행복과 부귀영화를 추구하도록 하고 종교의 교의와 내포를 변질시킬 것을 고무격려하였다.

불교는 살인을 금지하는데 중국 공산당은 진반(鎭反)할 때 사람들을 마구 죽였고, 정치 승려들은 “반혁명을 죽이는 것은 더욱 큰 자비이다.”란 설법을 만들어냈다. 심지어 한국전쟁 시기에는 직접 승려들을 전선에 내보내 살인하게 하였다.

기독교의 예를 들어보자. 우야오쭝(吳耀宗 1893~1975)은 1950년에‘자치(自治)·자양(自養)·자전(自傳)’이란 ‘3자(三自)’교회를 만들었다. 말로는 제국주의와의 연결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이른바 ‘미국에 대항하여 북한을 돕는다(抗美援朝)’에 투입한다고 하였다. 그의 한 친구가 ‘3자’에 가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감옥에 20여 년 동안 갇혀 갖은 매질과 치욕을 당하였다. 그 친구는 우야오쭝에게 이렇게 물었다. “너는 예수께서 하신 기적『神跡』들을 어떻게 보느냐?” 우야오쭝은 “나는 그것들을 모두 버렸다.”고 대답하였다.

예수의 기적을 승인하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예수의 천국을 승인하지 않는 것이다. 예수의 천국마저 승인하지 않는데 어찌 기독교도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야오쭝은 오히려 3자교회의 창시인이 되어 정치협상회의 상무위원이 되었다. 그가 인민대회당에 들어갈 때 예수가 말한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는 계명 중의 첫째이자 아울러 가장 큰 것이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케사르의 것은 케사르에게”를 완전히 잊어버렸다.

중국 공산당은 “절의 재산을 몰수하고 승려와 비구니더러 마르크스주의를 배우도록 강요하고 강제세뇌를 강화하였으며 승려, 비구니를 노동에 참가하도록 강요하였다. 예를 들어 저장성(浙江省) 닝버(寧波)에는 ‘불교공장’이 하나 있으며, 그곳에서는 2만5000천명에 달하는 과거 승려, 비구니들의 노동력을 짜내고 있었다. 더욱 황당한 것은 중국 공산당은 스님과 비구니를 결혼하도록 장려하여 불교신앙을 와해하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1951년 3.8절 전에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 부녀연합회는 전 성(省)의 비구니들에게 반드시 며칠 내로 결혼하라고 명령하였다! 그 외 젊고 힘센 남자 승려들은 전쟁에 참가할 것을 강요하였고 전쟁터에 보내 총알받이를 만들었다!

중국의 각종 종교단체는 공산당의 폭력적인 탄압 하에 와해되었다. 불교계, 도교계의 진정한 엘리트들은 탄압받았고 남은 사람들 중 아주 많은 이들이 환속하였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비밀 공산당원으로서 전문적으로 가사, 도포, 목사의 옷을 입고 불경, 도장(道藏), 성경을 왜곡하며 이런 경전들 속에서 중국 공산당의 운동을 위한 근거를 찾고 있었다.
(3)문물파괴

문물에 대한 파괴 역시 중국 공산당이 전통문화를 훼멸시킨 중요한 부분이다. ‘4가지 낡은 것을 파괴(破4舊)’하는 중에서 지식인들이 소중히 간직했던 수많은 희귀본과 서화(書畵)들이 모두 불에 타 없어지거나 혹은 종이의 원료로 되었다. 장보쥔(章伯鈞)의 집은 장서가 1만권을 넘었으나 홍위병 우두머리가 이것으로 불을 지펴 난방을 하고 남은 것은 종이공장에 보내 펄프로 만들었다.

사람들에게 고대 서화의 ‘신의(神醫)’로 불린 서화표구 전문가 훙츄성(洪秋聲) 노인은, 무수한 절세의 가작(佳作)들을 표구하였다. 예를 들어 송나라 휘종 황제의 산수화, 소동파의 대나무 그림, 명대(明代)의 유명한 화가인 문징명(文徵明)당백호(唐伯虎)의 그림 등이다. 몇 십 년 동안 그가 표구한 수백가지의 고대 서화는 대다수가 국보급 소장품에 속했다. 그가 심혈을 다하여 소장한 이름난 서화들이 4가지 낡은 것을 파괴한다는 미명하에 모두 불태워졌다. 그 후 훙선생은 눈물을 머금고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백 근이 넘는 서화가 아주 오랫동안 불에 탔습니다!” (딩수(丁抒)가 쓴 『얼마나 많은 문화재가 불태워졌는가?』중에서 인용)

사람의 일은 늘 새롭게 바뀌어,
오고가매 예와 오늘을 이루거니.
강산에 뛰어난 자취를 남겨,
우리 다시 올라 바라보노라.
人事有代謝,往來成古今,江山留勝跡,我輩復登臨……”

현대 중국인들이 만약 역사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기억이 있다면 맹호연(孟浩然)의 시 「여럿이 더불어 현산에 오르다(與諸子登峴山)」를 읊으면 아마도 유달리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있을 것이다. ‘강산의 명승고적’도 4가지 낡은 것을 타파하는 광풍 속에서 짓밟히고 소실되었다. 왕희지가 쓴, 천년을 내려온 『난정집서(蘭亭集序)』의 난정이 파괴되었을 뿐만 아니라 왕희지 본인의 묘마저 파괴되었다. 명대의 저명한 문필가 오승은(吳承恩)의 장쑤(江蘇) 옛집도 파괴되었고 오경재(吳敬梓)의 안후이(安徽)에 있던 옛집도 파괴되었다. 소동파가 직접 쓴 『취옹정기 (醉翁亭記)』라는 비석도 홍위병들에 의해 파괴되었고 비석 위의 글자들도 지워졌다……

중국 문화의 이런 정화(精華)들은 수천년동안 전승되어 내려온 것으로 일단 훼멸되면 복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은 오히려 ‘혁명’이라는 미명하에 아주 당당하게 없애버렸다. 영불(英佛) 연합군이 정원 중의 으뜸인 원명원(圓明園)을 불태워 없앤 것에 대하여 탄식하고, 침략자들에 의해 사라진 『영락대전(榮樂大全)』에 대해 탄식하면서, 우리는 왜 중국 공산당의 훼멸이 침입자들 보다 더 광범위하고 더 지속적이며 더 철저했음은 생각하지 못하는가?
(4) 정신방면의 훼멸

중국 공산당은 물질방면에서 종교와 문화를 훼멸시킨 것 외에도 또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사람들의 신앙과 문화에 대한 승인을 정신적으로 훼멸시켰다.

예를 들면 중국 공산당은 회교도들의 풍속이 4가지 낡은 것에 속하다고 여기고 그들에게 돼지고기를 먹도록 강요하였다. 또한 회교도 농가와 청진사(淸眞寺)에 돼지를 기르도록 명령하였으며 매 가구마다 매년 돼지 두 마리씩 바치도록 하였다. 홍위병은 심지어 티벳불교의 제2대 활불인 판첸라마에게 강제로 대변을 먹이기도 했고 하얼빈 최대의 근대사찰인 극락사(極樂寺)의 스님 3명에겐 종이로 만든 팻말을 들게 했는데, 위에는 “불경은 무슨 불경인가? 모두 개소리이다.”라고 씌여 있었다.

1971년 마오쩌둥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려다 실패한 린뱌오(林彪)가 도망가다가 몽고의 운둘칸(Undurkhan)에서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 나중에 린뱌오가 살던 베이징 마오자완(毛家灣)에서 공자어록을 찾아냈을 때, 전국에서는 공자를 미친듯이 비평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량샤오(梁效)는 『홍기(紅旗)』 잡지에서 『공구 그 사람(孔丘其人)』이란 글을 발표하여 공자를 ‘역사를 뒷걸음치게 한 복귀광’이자 ‘허위적이고 교활한 정치 사기꾼’이라고 묘사했으며 공자를 추하게 만든 만화와 노래가 잇달아 발표되었다.
종교와 문화의 장엄함과 신성함은 이런 식으로 깡끄리 파괴되었다.
(5) 끝없는 파괴

중국 고대에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는 현(縣)까지만 미쳤고 현 이하는 전부 종족(宗族)자치를 실시하였다. 그러므로 진시황의 분서갱유이든 4차례의 멸불(滅佛)정책이든, 모두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온 운동으로서, 이런 파괴는 중앙의 권력이 닿지 않는 곳까지 철저히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불가와 유가의 전적(典籍)과 사상은 민간에서 거대한 생존공간이 존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은 사춘기 중학생들까지 선동하여 ‘4가지 낡은 것을 타파(破4舊)’하는 운동을 진행시켰다. 이것은 전국적으로 일종의 ‘자발적이며 열정적인’ 성격을 띤 풀뿌리 운동이었다. 동시에 ‘마을마다 당지부가 존재하는’ 엄밀한 사회통제체계로 인해 이런 ‘혁명’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으며 모든 사람, 모든 지역으로 뻗쳐 나갔다.

아울러 역사에서 그 어떤 황제도 폭력을 사용한 것 외에는 중국 공산당처럼 비방하고 매도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사람들이 가장 신성하고 아름답게 여기는 것을 송두리째 뽑아 버린 적은 없었다. 사상적인 면에서의 소멸은 때론 단순한 물질적인 소멸보다 더 효과적이고 더 오래가는 것이다.
(6) 지식인 개조

중국의 한자(漢字)는 5000년 문명의 정화(精華)로 자형(字形), 자음(字音)에서부터 이로 만들어진 성어(成語)와 전고(典故)에 이르기까지 모두 심오한 문화적 내포가 들어있다. 중국 공산당은 한자를 간체(簡體)로 만들고 이외에 병음화 정책을 채택하여 살아있는 언어 문자에서 문화 중의 일체 전통을 없애려 하였다. 나중에 도저히 현실적으로 실시할 수 없게 되어서야 그만 두었다. 그러나 전통문화를 이어 받은 지식인들게는 이런 행운이 따르지 않았다.

1949년 공산화 이전에 중국에는 약 200만 명의 지식인이 있었다. 비록 그들 중 일부는 서양에 유학을 갔다 온 사람도 있었지만 여전히 유가 사상을 이어 받은 사람들이 있었다. 중국 공산당은 그들을 가만 두지 않았다. ‘사대부’계층 사람들의 사상이 민간의 의식형태에 적지 않은 작용을 일으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51년 9월 중국 공산당은 베이징대학에서부터 기세 높게 지식인들의 '사상개조운동'을 시작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성실한 역사청산운동을 조직하여 그 중에 반혁명분자를 청리'하였다. 마오쩌둥은 본래 지식인들을 싫어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하나의 진리를 알아야 하는 바, 많은 지식인들은 사실상 가장 무식한 노동자·농민보다 때로는 지식이 더 적다.”
“개조되지 않은 지식인과 노동자·농민을 비교할 때 지식인은 정신적으로 깨끗하지 못한 부분이 많을 뿐만 아니라 신체 역시 깨끗하지 않다. 가장 깨끗한 것은 그래도 노동자와 농민이다. 비록 그들의 손은 검고 발에는 쇠똥이 묻었다 하더라도 말이다.”

지식인들에 대한 중국 공산당의 박해는 여러 가지 형식의 대비판부터 시작하였다. 1951년의 ‘행걸판학(行乞辦學)’의 우쉰(武訓)을 비판하던 데로부터 1955년 마오쩌둥이 직접 후펑(胡風)을 반혁명으로 몰아 세울 때까지만 해도 공산당은 아직까지는 지식인들을 특별한 부류로 분류하진 않았다. 하지만 1957년 통일전선 전술을 통해 전통 종교들을 아주 고분고분하게 만들었을 때, 중국 공산당은 드디어 지식인들에게 손을 뻗쳤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반우파 투쟁’이다.

1957년 2월 말, 중국 공산당은 ‘백화제방,백가쟁명(百花齊放,百家爭鳴)’을 호소하면서 지식인들에게 공산당에 대한 의견을 제출하라고 격려하면서 ‘말한 자는 죄가 없다’라고 간절하게 표현하였다. 일찍이 중국 공산당의 진반(鎭反),숙반(肅反)과 당이 일체를 지도하고 문외한으로서 전혀 모르는 과학, 철학, 문화예술 분야에서 함부로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에 불만이 많았던 지식인들은, 중국 공산당이 이제야 정신을 차리는구나 싶어서 내심의 말을 꺼내놓기 시작하였고 하는 말도 갈수록 격렬해졌다.

많은 세월이 지났음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이 사건을 중국 공산당에 대한 지식인들의 비판이 한계를 넘은 상황에서, 마오쩌둥이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할 수 없이 반격을 가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1957년 5월 15일, 마오쩌둥은 『상황이 변하고 있다』는 글을 써서 당내 고위 간부들에게 전달하였다. 글에서 “최근 한 시기, 우파는 가장 견결(堅決)하고 발광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들은 중국 땅에서 7급 이상의 태풍을 일으켜 공산당을 없애려 하고 있다.”고 썼다. 이어서 그런 ‘대명대방(大鳴大放)’에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던 각급 당 관리들은 갑자기 지극히 열성적이며 성실해지기 시작했다. 장보쥔(章伯鈞)의 딸은 자신의 회고록 『지난 일은 연기처럼 사라지지 않는다』에서 이렇게 썼다.

“중국 공산당 통일전선부 부장 리웨이한(李維漢)이 직접 전화를 걸어 장보쥔(章伯鈞)에게 정풍(整風)좌담회에 참가할 것을 요청하고는 맨 앞줄 큰 쇼파에 아버지를 앉게 했다. 아버지는 그것이 계략인 줄 모르고 많은 의견을 제출하였다. 이 과정에서 '리웨이한(李維漢)은 매우 즐거운 표정이었다. 아버지는 그가 자신의 말을 찬양하는 줄로만 알았다. 사실 그는 사냥감이 올가미에 걸린 것을 보고 기뻐하고 있었음을 누가 알았으랴!” 장보쥔(章伯鈞)은 그 후 중국 최대의 우파분자로 몰렸다.

아래에서 1957년 당시 이른바 우파분자들의 의견과 비판이 제기된 날짜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장보쥔(章伯鈞)의 『정치설계원(政治設計院)』이 5월 21일, 룽윈(龍雲)의 『소련의 황당무계한 논리를 반대한다』가 5월 22일, 뤄룽지(羅隆基)의 『명예회복(平反) 위원회』가 5월 22일, 린시링(林希翎)이 베이징대학에서 한『중공의 봉건사회주의를 규탄한다』는 강연이 5월 30일, 우쭈광(吳祖光)의 『당은 서둘러 예술사업 지도를 중단하라』가 5월 31일, 추안핑(儲安平)의 『당의 천하』가 6월 1일이었다. 이 모두는 마오쩌둥이 칼을 갈아 놓은 후 지식인들을 '초청'하여 발표한 언론이었다.

물론 이런 지식인들은 그 뒤에 ‘우파’로 몰렸고 이런 ‘우파’는 전국에 55만 명이나 되었다.
중국 전통문화 중에는 “선비를 죽일 수는 있어도 모욕해서는 안 된다.”는 정신이 있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은 모욕을 당하지 않으면 그에게 식권을 발급하지 않았으며 가족들까지도 연루시켰다. 그리하여 많은 지식인들은 정말로 굴복하였고 이 과정에서 일부 지식인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적발하여 많은 사람들을 상심(傷心)케 하였다. 진정으로 모욕할 수 없는 지식인은 다른 사람들을 위협하기 위한 수단으로 죽임을 당했다. 전통 사회도덕의 본보기인 ‘선비『士』’계층은 이렇게 소실되었다.

마오쩌둥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진시황이 다 무엇인가? 그는 460명의 유생을 묻었지만, 우리는 4만6천 명의 지식인을 파묻었다. 우리가 진반(鎭反)하면서 일부 반혁명분자들을 죽이지 못하겠는가? 나는 민주 인사들과 변론할 때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당신들이 우리를 진시황과 같다고 욕한다는데 그렇지 않다. 우리는 진시황을 백배이상 초월했다.”
사실 그가 어찌 지식인만 묻었겠는가? 더 엄중한 것은 그들의 신앙과 마음을 타파한 것이다.
(7) 비슷한 것으로 뒤바뀐 표면 문화

중국 공산당은 개혁·개방 이후 아주 많은 절과 도교 사원 및 교회를 다시 수리하여, 중국 내에서는 각종 종교행사를 하고 중국 외에서는 각종 문화 행사를 펼쳤다. 이것은 중국 공산당이 그나마 남아 있던 전통 문화를 마지막으로 파괴하고 이용한 것이다. 이렇게 한 이유는 한편으로는 인간성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선량함이 ‘당(黨)문화’를 파산으로 나아가게 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 공산당이 전통 문화를 빌어 자신을 꾸미고 중국 공산당의 ‘거짓(假), 사악(惡), 투쟁(鬪)’이라는 사악한 본성을 덮어 감추려고 했기 때문이다.

문화의 근본은 도덕적 내포이며 오락 작용은 지엽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은 문화 표면의 오락기능을 회복하여 도덕적 내포라는 실질의 파괴를 은폐하였다. 중국 공산당이 아무리 글, 그림, 골동품을 전시하고 용춤, 사자춤을 추는 문화 행사, 식품 축제를 주최하며, 아무리 많은 전통 건축을 짓는다 해도 모두 문화의 표면을 회복한 것에 불과하며 문화의 정수(精髓)는 아니다. 아울러 이를 이용하여 국내외에서 중국 공산당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극대화시켰는데 실질적으로는 공산당 통치를 수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시 불교 사찰을 예로 들어보자. 이 곳은 본래 아침에 종을 울리고 저녁에 북을 치며, 등불을 밝혀 부처님께 의식을 행하는 장소로 때로는 속세의 사람들이 참회하고 예배하는 곳이다. 수행은 청정(淸靜)함과 무위(無爲)를 중요시 하며 참회와 예배도 장엄하고 엄숙한 환경을 요구한다. 그런데 지금은 돈벌이를 위한 유람 명승지로 탈바꿈시켰다. 절을 찾아 온 사람 중에, 과연 몇 사람이나 목욕재계한 후 진정으로 경건하게 부처님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있는가?

외관만 꾸미고 내포를 훼손하는, 이것 역시 중국 공산당이 세인(世人)을 미혹시키는 책략이다. 불교이든 기타 종교이든 아니면 파생문화이든지 막론하고 중국 공산당은 전통문화를 이 지경까지 타락시킨 것이다.

당(黨)문화


중국 공산당은 전통적인 반신(半神)문화를 파괴한 동시에 끊임없는 정치운동을 통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중국 공산당 자신의 당문화를 수립하였다. 당문화는 구(舊)세대를 개조하였고 젊은 세대를 독해(毒害)시켰으며 어린 세대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그 영향력은 너무나 깊고 광범위하여 심지어 많은 사람들이 중국 공산당을 폭로하려고 시도할 때조차도, 불가피하게 공산당 문화의 낙인을 지니고 중국 공산당의 선악(善惡) 표준과 사유방식 및 언어 체계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이다.

당문화는 외부에서 들어 온 마르크스-레닌주의 문화의 ‘사악(邪)’한 영향을 많이 받은 것 외에도, 중국 사람들이 몇 천 년 이래 누적해 온 반면적인 요소들 예를 들면 궁중암투, 파벌당쟁, 권모술수와 공산당이 선전하는 폭력혁명, 투쟁철학을 효과적으로 결합하였다. 공산당은 지난 수십년간 생존위기 속에서 발악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거짓(假), 사악(惡), 투쟁(鬪)’의 특징을 보강하고 더욱 확대발전시켰다.

당문화의 성격은 전제정치와 독재로서 공산당의 정치투쟁과 계급투쟁을 위해 봉사한다. 그것은 4개 방면에서 공산당의 테러적이며 독재적인 ‘인문(人文)’ 환경을 구성하였다.
(1) 통치방면

① 폐쇄 문화

공산당 문화는 폐쇄적이며 독단적이다. 사상, 언론, 결사, 신앙 등의 자유가 없다. 당의 통치는 마치 한 세트의 수압시스템처럼 높은 압력과 봉폐에 의지하여 유지된다. 작은 구멍마저도 시스템의 붕괴를 초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6.4 때 공산당은 학생들과의 대화를 시도조차 하지 않았는데 바로 이 구멍이 열릴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구멍이 일단 열리기만 하면 노동자, 농민, 지식인, 군인 등이 모두 대화를 요구할 것이고 중국은 민주화 될 것이다. 이것은 일당독재에 도전하는 것과 같으므로 차라리 살인을 할지라도 이렇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 공산당은 수만 명의 사이버 경찰을 동원하여 인터넷을 감시하고 있으며 공산당이 좋아하지 않는 해외 사이트는 직접 봉쇄하고 있다.

② 테러 문화
공산당은 지난 55년 동안 테러로 중국 인민의 영혼을 압박하였다. 높이 걸린 채찍, 높이 든 칼, 언제 드리워질지 모르는 재난은 사람들의 행위방식을 ‘규범화’시켰다. 사람들은 테러 속에서 고분고분한 순한 양이 되었다. 민주화 운동 인사, 자유 사상가, 체제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 각종 종교단체 구성원들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경고를 주려는 목적으로 희생되었다. 또한 공산당은 자신과 다른 것은 맹아상태에서 싹이 자라기 전에 말살시켰다.

③ 네트워크 통제 문화
주민등록과 호적제도, 가도(街道) 주민위원회 제도, 각급 당위원회 구조, “각 직장마다 당 지부가 있고”, “마을마다 당 지부가 있다.” 또한 공산당과 공산청년단 조직 생활을 통해 “자기 문단속을 잘하고 자기 사람을 잘 감시하며” “상방(上訪)을 차단하고”. “자신이 맡은 임무를 철저히 책임지고 책임추궁제를 단호히 실행하여 엄밀하게 통제하며, 규율을 엄숙히 하여 24시간 방범관리가 통제를 잃지 않도록 확보한다.” “610사무실은 감독팀을 조직하여 각 지역과 회사에 대해 부정기적으로 감독한다.”

④ 연좌문화
중국 공산당은 현대사회 법치주의 원칙에서 크게 벗어난 연좌제를 대대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지주, 부자, 반동, 나쁜 사람, 우파’로 낙인 찍힌 가족들에 대한 독재에서부터 출신성분론을 제출한 데까지, 공산당은 지금까지도 줄곧 연좌제를 시행해 오고 있다. 가령 파룬궁 수련생이 베이징에 가서 청원을 할 경우 직장 책임자는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하고 조치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책임 추궁을 당하거나 비판을 받는데 더 심한 경우는 징계처분을 받기도 한다.

“(가정에서) 한 사람이 파룬궁을 연마하면 온 가족을 실직시키고”, “(직장에서) 한 사람이 연공하면 전체 직원들의 상여금을 지급하지 않는” 등등.

중국 공산당은 이른바 ‘교육을 잘 받을 것 같은 자녀들’과 ‘검은 5부류’에 대해 차별정책을 실시한다. 그들에게 공산당과 일치할 것을 제창하면서 이른바 대의(大義)를 위해 친족을 무시할 것을 요구한다. 아울러 인사 및 조직에 관한 기록문서를 통하여 사람들을 통제한다.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의 잘못을 비판하고 적발할 것을 요구하며 당의 요구에 부응하는 경우에는 포상 및 재배치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2)문화선전 부문

① 일언당(一言堂) 문화
문화대혁명 당시 중국에서는 ‘최고지시’, ‘(마오쩌둥의) 한 마디가 만 마디를 능가하고 구절마다 진리이다.’라는 말이 널리 통용되었다. 당 지도자의 최고지시가 떨어지기만 하면 모든 매스컴이 다 달려들어 단체로 동조한다. 필요시에는 각급 당, 정부, 군대, 노조, 청년단, 부녀회 지도자를 데려와 태도를 표시하도록 하며, 지지하게 하고 사람마다 고비를 넘게 한다.

② 폭력문화 고취
8억이나 되는데 싸우지 않고 되겠는가?”, “때려 죽이면 그만이다”, “전면전”, “원자폭탄은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중국 사람의 절반을 죽인다 해도 남은 절반의 사람들이 폐허 위에 다시 세울 것이다.”

③ 증오 선동 문화
“계급의 고달픔을 잊지 말고 피눈물 나게 만든 원수를 잊지 말자.”는 것이 중국의 국시가 되었고 계급의 적에 대한 잔인함을 미덕으로 삼는다. “원수를 깨물고 한(恨)을 깨물고 원한을 씹어서 억지로 삼키면 원한은 마음속에 들어가 싹을 틔운다.”

④ 거짓말 문화
“1무(畝)당 식량 생산량이 만근을 넘었다.”, “6.4 천안문에서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다.”, “우리는 이미 사스를 통제하였다.”, “지금은 중국 인권이 가장 좋은 시기이다.”, “3개 대표.”

⑤ 세뇌 문화
“공산당이 없으면 신 중국이 없다.” “우리 사업을 지도하는 핵심 역량은 중국 공산당이며, 우리 사상을 지도하는 이론 기초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이다.”, “당 중앙과 고도의 일치를 유지해야 한다.” “이해한 것은 집행하고 이해하지 못한 것도 집행해야 하며 집행하는 중에 이해를 깊이 해야 한다.”

⑥ 아첨 문화
“천지(天地)가 아무리 커도 당의 은혜만은 못하다.” “모든 공(功)은 당에 있다.” “나는 당을 어머니에 비유한다.” “생명을 바쳐 당 중앙을 보호하자.” “위대하고 영광스럽고 정확한 당” “패배를 모르는 당” 등등이다.

⑦ 대충대충 문화
계속적으로 모범을 세우고 전형을 만들어 ‘사회주의 정신문명 건설’과 사상교육을 실시한다. 그 결과 운동이 지나가면 모두들 전에 하던 그대로 하는데 모든 보고회, 독서회, 심득교류는 전부 연극 무대에 잠시 등장했다 사라지는 배역처럼 일시적인 것이 되고, 사회 도덕은 계속해서 크게 뒷걸음질친다.
(3)인간관계

① 질투 문화
절대평균주의를 선전하며 자신보다 능력이 있거나 돈이 많은 사람을 질투한다. 홍안병(紅眼病)이라고도 한다.

② 사람이 사람을 짓밟는 문화
“서로 얼굴을 맞대고 투쟁하며 뒤에서는 폭로 비판한다.” 밀고(密告) 하거나, 남을 폭로비판하는 자료를 쓰게 하고, 터무니없는 것을 날조하며, 하찮은 것을 끊임없이 과장한다. 이 모든 것들은 당조직에 의해 당과 얼마나 가까운가를 판단하는 지표로 된다.
(4) 사람의 내재적 정신과 외재적 행위를 은연 중에 변화시키고 규범시킴

① 사람을 기계로 만드는 문화
공산당은 민중들에게 ‘혁명 기계에서 녹슬지 않는 나사못’이 되고 ‘당에 순종하는 도구’가 되며 ‘당이 지시하는 대로 따라 할 것’을 요구하였다. “마오주석의 전사(戰士)는 당의 말을 잘 듣는다. 당이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나 가고 당이 어려운 곳이 있으면 그곳에 정착한다.”

② 시비(是非)가 뒤집힌 문화
문화대혁명 기간에 공산당은 “사회주의의 풀을 가질지언정 자본주의의 곡식을 갖지 않는다.” 총으로 살인하는 것은 ‘20년 간의 안정을 얻기 위한 것이다.’라고 했는데 ‘자기가 하기 싫은 것은 남에게 시킨다.’는 말은 공산당의 입장을 선명하게 드러내 준다.

③ 자아 세뇌와 절대 복종 문화
“하급자는 상급자에 복종하고 전당(全黨)은 중앙에 복종한다.”, “이기적인 생각은 떠오르기만 해도 그것과 치열하게 싸워라.”, “영혼 깊은 곳에서 혁명을 폭발시켜라.”, “당 중앙과 고도의 일치를 유지하라.”, “사상을 통일하고 발걸음을 통일하고 명령을 통일하고 지휘를 통일하라.”

④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문화
“공산당이 없으면 중국은 곧 혼란해질 것이다.”, “이렇게 큰 중국을 공산당이 아니면 누가 지도할 수 있겠는가?”, “중국이 넘어지면 세계의 재난이다. 때문에 공산당을 도와 그것의 영도를 수호해야 한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오랫동안 공산당의 압력을 받아 온 단체들은 두려운 마음과 자신을 보호하려는 마음에서 공산당보다 더욱 좌파적임을 수시로 표현해야 한다.
무릇 이와 비슷한 예를 들자면 아직도 매우 많다. 독자들은 모두 자신이 직접 겪은 경험 속에서 당문화의 각종 요소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문화대혁명을 겪은 사람들은 여전히 모범극어록가(語錄歌), 충자무(忠字舞)에 대한 기억이 새로울 것이다. 이외에도 『백모녀(白毛女)』,『지도전(地道戰)』,『지뢰전(地雷戰)』의 대사가 귀에 익을 것이다.

사실 중국 공산당은 바로 이런 문예형식을 통하여 세뇌를 진행한다. 이런 식으로 중국 공산당은 당이 얼마나 ‘영명하고 위대하며’, 적과의 투쟁에서 얼마나 ‘고생을 겪었고 탁월했는지’, 당의 전사는 당에 대하여 얼마나 ‘일편단심’이며 당을 위해 일체를 희생할 수 있었으며, 적은 얼마나 아둔하고 악독한가 등등을 사람들의 머리 속에 강제로 주입하였다. 공산당이 필요로 하는 가치관을 날마다 반복하여 선전함으로써 매 사람에게 주입시켰다. 오늘날 돌이켜 음악무용 역사시(歷史詩) 『동방홍(東方紅)』을 보면 전체적인 주제와 표현방식은 모두 ‘살인! 살인! 살인!’이었다.

동시에 중국 공산당은 자신의 일련의 언어체계를 만들어 냈다. 경멸하는 투의 비판적인 언어, 공적과 은덕을 찬양하는 낯간지러운 언어, 텅 비어 형식적이고 무미건조한 문장 등등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입만 열면 자기도 모르게 ‘계급투쟁’과 ‘당을 찬양하는 노래’의 사상 형태 속으로 떨어지게 하였고, 평온하고 온화한 마음으로 도리를 논하는 것을 패권을 다투는 언어로 대체하였다. 또한 공산당은 종교적인 단어를 남용했을 뿐만 아니라 단어의 내포까지도 왜곡시켰다.

진리에서 한 걸음만 벗어나도 곧 바로 오류이다. 당문화는 또한 일정한 정도로 전통가치관을 남용(濫用)하였다. 예를 들어 전통문화 는‘믿음(信)’을 말하는데 공산당도 믿음을 말하지만, 공산당이 말하는 것은 ‘당에 대하여 충실하고 고분고분함’이다. 전통문화에서는 ‘효도(孝)’를 말하는데 공산당도 부모를 모시지 않는 사람을 감옥에 잡아간다. 그러나 그 이유는 자식이 부모를 모시지 않음으로써 부모가 정부의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아울러 공산당이 필요로 할 때는 자식들은 또 부모와 경계선『界線』을 그어야 한다. 전통문화에서 ‘충성『忠』’을 말하지만, “군주는 가볍고 백성이 귀하며 사직이 중요하다.” 그러나 공산당이 말하는 ‘충성’은 ‘어리석은 충성’이고 ‘공산당을 미신(迷信)하고 맹종할 정도의 복종’을 요구하는 등이다.

중국 공산당이 상용(常用)하는 단어는 사람들을 미혹시키는 경향이 아주 강하다. 예를 들어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 시기를 ‘해방전쟁’이라고 부르는데, 마치 공산당이 중국 인민을 압박에서 ‘해방’시킨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1949년 이후를 ‘건국(建國) 이후’라고 부르는데 사실 중국에는 공산당 이전에도 엄연히 나라가 존재하고 있었고 중국 공산당은 단지 하나의 새로운 정권을 건립했을 뿐이다. 3년 대기근을 ‘3년 자연재해’로 부르는데, 사실 이 시기 기근은 결코 자연재해가 아니었으며 철저한 인재(人災)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늘 이런 단어들을 자주 사용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공산당이 사람들에게 주입하려는 개념을 받아들이게 된다.

전통문화에서 음악(音樂)은 사람의 욕구를 제약하는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사마천이 지은『사기(史記)』 「악서(樂書)」에서는 “사람의 천성은 조용하여 외물을 감지한 후에야 사람의 정감(情感)에 영향을 주며 아울러 자신의 심지(心智)에 따라 좋아하고 싫어하는 정(情)이 생긴다. 만약 제약하지 않는다면 사람은 무궁무진한 외부 유혹과 내심의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에 동화하여 수많은 나쁜 일을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선왕(先王)은 예악(禮樂)을 만들어 사람을 제약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가곡은 “즐겁되 음란하지 않으며 슬프되 상심하지 않는다.” 즉 감정을 끌어내는 동시에 감정에 대해 어느 정도 제약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공자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시경(詩經)』에 나오는 삼백편의 시를 한마디로 하자면 생각에 삿됨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아름다운 음악도, 공산당은 도리어 사람을 세뇌시키는 수단으로 만들어 버렸다. ‘사회주의는 좋다’, ‘공산당이 없으면 신(新) 중국은 없다.’ 등의 가요는 유치원부터 시작하여 대학까지 부른다. 이런 노래들을 흥얼거리는 과정 속에서, 사람들은 은연 중에 자연스럽게 노래에서 표현한 뜻을 받아들이게 된다. 중국 공산당은 더욱이 민간에서 유전되어 온 가장 듣기 좋은 민요를 직접 도용(盜用)하여 원래 곡조에 공산당을 찬양하는 가사를 덧붙여, 전통문화를 파괴하는 동시에 공산당을 위해 이용하였다.

중국 공산당이 경전(經典)처럼 떠받드는 마오쩌둥의 『옌안(延安) 문예좌담회에서의 강화』에서는 문화와 군사를 ‘문무(文武) 두 가지 전선’으로 불렀다. 아울러 무기만 든 군대로는 모자라고 또 ‘문화적인 군대’가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또 ‘문예는 정치에 복종해야 한다.’고 규정했는데, “노동자계급의 문학예술은…… 전반 혁명기계 속에서 『기어와 나사못』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무신론’과 ‘계급투쟁’을 핵심으로 하는 일련의 ‘당문화’가 파생되었는데 전통문화와는 완전히 다른 길로 가게 되었다.

‘당문화’는 확실히 중국 공산당이 사회를 통제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당문화는 마치 군대, 감옥, 경찰과 같이 폭력기계에 속하는데, 차이가 있다면 육체적인 폭력이 아닌 ‘문화폭력’이라는 점일 뿐이다. 이런 문화폭력은 5천년 전통문화를 파괴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어지럽게 했으며 또한 민족의 응집력을 약화시켰다.

오늘날 수많은 중국인들은 전통문화의 정수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으며, 심지어 50여 년 동안의 ‘당문화’가 중국 5천년 전통문화와 같다고 알고 있다. 이것은 중국인의 비애이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전통문화를 반대할 때, 자신들이 실질적으로 반대하고 있는 것은 중국 공산당의 ‘당문화’이지 진정한 전통문화가 아님을 모르고 있다.

지금 중국의 많은 사람들은 서양식 민주제도로 중국의 현행제도를 바꾸려고 한다. 사실 서양의 민주도,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문화기초 위에서 건립되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를 주장하고 인간성과 사람의 선택을 존중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 공산당의 이런 독재적이고 비인간적인 ‘당문화’가 어찌 서양의 민주제도로 될 수 있겠는가?
결 론

전통문화는 사실상 송대(宋代)부터 시작하여 끊임없이 파괴되어 전통에서 벗어났다. 5.4 이후 급속한 성공과 이익을 추구했던 일부 지식인들도 전통문화를 부정하고 서양문명에 기대어 중국의 출로(出路)를 찾고자 시도하였다. 그러나 문화영역의 충돌과 변화는 줄곧 학술적인 논쟁만 있었지 국가폭력이 개입되지는 않았다. 중국 공산당의 출현은 문화적 충돌을 중국 공산당의 존망과 직접 연결되도록 했고, 이에 공산당은 문화를 직접 파괴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통문화의 찌꺼기만 취하고 정수를 없애는’ 방식 및 전통문화를 남용하는 방식으로 간접적으로도 파괴하였다.

이와 같은 민족문화의 파괴과정은 동시에 ‘당문화’를 건립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공산당은 사람들 마음 속의 양심을 뒤엎었고 사람들로 하여금 민족의 전통에서 멀어지도록 하였다. 민족문화가 철저히 훼멸되는 날은 곧 민족이라는 이름만 존재하고 실체가 사라지는 날인데, 이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동시에 민족문화의 파괴는 또한 중국인들에게 생각지도 못한 물질적 상해(傷害)를 가져다 주었다.

전통문화는 천인(天人)이 합일(合一)하며 자연과 화목하게 공존한다. 그러나 공산당은 “하늘과 싸우니 그 즐거움이 무궁하고 땅과 싸우니 그 즐거움이 무궁하다.”고 하였다. 지금 중국의 생존환경은 엄중하게 파괴되었는데 이는 당문화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수(水)자원을 예로 들면, 중국인은 “군자는 재물을 아끼지만 도(道)에 맞게 얻는다.(君子愛財,取之有道)”는 전통을 포기하고 미친 듯이 자연을 착취하고 오염시켰다. 현재 중국의 5만 킬로미터에 달하는 하천 중에서 4분의 3 이상에 어류(魚類)가 살지 못한다. 지하수의 오염 비율은 십 몇 년 전에 비해 3분의 1이나 증가하였고 지금도 계속 악화되고 있다. 회하(淮河)에서는 심지어 한 어린이가 기름이 오염된 강물 위에서 놀다가 수면에 불꽃이 떨어져 5미터가 넘는 화염이 치솟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 화재로 인해 주위에 있던 십여 그루의 버드나무가 불에 탔다. 그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이런 물을 마시고 있는데 각종 암과 괴질(怪疾)에 걸리지 않을 수 없다. 서북(西北)지역의 사막화, 염전(鹽田)화,공업발달지역의 오염 등은 모두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자연에 대한 경외(敬畏)를 잃어버린 것과 관련이 있다.

전통문화는 생명을 경외(敬畏)하지만, 중국 공산당은 ‘반란에도 도리가 있고(造反有理)’, ‘사람과 싸움에 그 즐거움이 무궁하다.’고 한다. 혁명이란 이름으로 수 천 수 만 명을 죽일 수도 있는데, 심지어 굶겨 죽일 수도 있다. 이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생명에 대한 멸시 풍조를 가져왔고 모조품, 독극물의 유행을 조장하였다. 안후이 푸양(安徽 阜陽)을 예로 들면, 본래 건강했던 아이들이 수유(授乳)기간에 팔다리가 짧아지고 신체가 허약해지면서 머리가 커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아울러 유아(乳兒) 8명이 이런 이상한 병에 걸려 요절하였다. 원인을 밝혀보니 돈에 눈이 먼 상인이 독극물이 들어간 분유(粉乳)를 판매한 것이었다.

이외에도 어떤 사람은 호르몬과 항생물질을 게, 뱀, 거북이에게 먹이고, 공업용 알코올로 가짜 술을 빚으며, 공업용 기름으로 쌀을 가공하고, 공업용 표백제로 밀가루를 표백한다. 허난성(河南省)의 한 현(縣)에서는 8년 동안 쓰레기기름 등 발암 물질을 이용하여 독이 든 식용유를 만들었는데 월(月) 생산량이 수천 톤에 달했다…… 독이 든 이런 식품들은 어느 한 시기 어느 한 지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널리 퍼진 보편적인 현상이다. 이는 문화가 파괴된 후 사람들의 마음이 도덕적인 구속력을 잃어버린 결과 한사코 물질과 향락을 추구하게 된 것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당문화’의 절대적인 전횡 및 배타성과는 달리, 전통문화는 거대한 포용성이 있다. 당나라가 흥성했던 시기에 불가(佛家)사상, 기독교와 기타 서양 종교는 모두 도가, 유가사상과 화목하게 공존할 수 있었다. 진정한 전통문화는 현대 서양문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개방적이며 포용하는 태도를 유지한다. 아시아의 4마리 용은 ‘신 유가문화권’을 형성하였는바, 이들 나라의 비약적인 발전은 이미 전통문화가 과학과 발전에 장애가 아님을 증명한 것이다.

동시에 진정한 전통문화는 인간 내면의 즐거움을 중시하며 외재적인 물질적 향락으로 삶의 질을 가늠하지 않는다. 도연명(陶淵明)은 가난하지만 불행하지 않았고 여전히 “동쪽 담 아래에서 국화를 따서 멀찍이 떨어진 남산을 바라보네”라고 말할 정도로 유유자적한 흥취가 있었다.

사실상 어떻게 생산을 발전시키며, 어떠한 사회제도를 선택할 것인가는 문화가 대답할 문제는 아니다. 문화는 도덕영역에서 중요한 인도작용을 할 뿐만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단속하도록 한다. 진정한 전통문화의 회귀는 마땅히 사람이 천지와 자연에 대한 겸손을 회복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신(神)을 경외하고 사람이 천지와 더불어 화목하게 공존하며 천수(天壽)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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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반고(盤古)
중국 신화에 의하면 반고(盤古)는 최초의 생명으로 만물을 창조하고 천지를 개벽했다고 한다.

2) 여와(女媧)
중국 전통 신화에서 사람을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여신(女神).

3) 신농(神農)
신농(神農)은 중국 신화에 나오는 전설의 황제이자 문화 영웅으로 5천년 전에 고대 중국인들에게 농업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또 수백 종의 약초와 독초는 물론 다양한 식물의 특성을 밝혀내어 전통 한의학 발전에 중대한 기여를 했다고 전해진다.

4) 창힐(倉頡)
중국 고대 제왕인 황제(黃帝) 때의 사관(史官)으로 눈이 4개나 있었으며 매우 총명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새와 짐승의 발자국을 본떠 한자(漢字)를 만들어 그때까지 새끼의 매듭으로 기호를 만들어 쓰던 불편을 덜어주었다고 한다. 창힐에 관한 전설은 전국시대(戰國時代) 후기 저작인 『순자(筍子)』에 기록이 있다.

5) 도법자연(道法自然)
『도덕경』의 한 구절.

6) “대학(大學)의 도(道)는 밝은 덕을 분명히 하는데 있다(大學之道,在明明德)”
원래는 『예기(禮記)』 제42편이었으나 나중에 신유학을 집대성한 주희에 의해 재구성되어 이후 이른바 4서(『논어』, 『맹자』, 『대학』, 『중용』)의 하나로 아주 중시되었다. 본문에서 인용된 부분은 『대학』 첫머리에 나오는 아주 유명한 구절이다.

7) 박대정심(博大精深)
직역하면 넓고 크며 정밀하고 심오하다는 뜻.

8) 성당(盛唐)시기
중국 역사상 가장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당나라(AD 618~907)를 다시 세분하여 초당(初唐, 618~712), 성당(盛唐, 712~762), 중당(中唐, 762~827), 만당(晩唐, 827~859)이라고 하는데 그중 기원 712년부터 762년까지를 성당이라고 한다.

9) “먼 곳의 사람들이 불복할 경우, 학문과 덕을 닦으면 자연히 오게 된다.”
“故遠人不服,則修文德以來之”(『논어』계씨(季氏)제16편.)

10) 도가사상
이 때문에 흔히 도가 사상을 “黃老之學”이라고 하는데 즉, 황제와 노자의 학문이라는 의미이다.

11) “도에 뜻을 두고, 덕에 근거하며, 인에 의지하고, 예에서 거닌다.”
“志於道,據於德,依於仁,遊於藝.”(『논어』 술이(述而) 제7편)

12)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朝聞道,夕死可矣.”(『논어』 이인(里仁) 제4편)

13) ‘모든 경전의 으뜸’
群經之首.

14) ‘입세(入世)’
속세에 들어가 동참한다는 의미로 세속을 떠나 수행한다는 출세(出世)의 반대말.

15) “효도하고 공경하는 그것이 바로 인(仁)의 근본이 아니겠느냐?”
“孝悌也者,其爲仁之本歟?”

16) “사람을 대함에 있어 공경하고 화목하게 지내는 자가 윗사람을 배신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其爲人也孝弟,而好犯上者,鮮矣.”(『논어』 학이(學而) 제1편)

17) ‘몸을 닦고, 집안을 다스리고,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할’
“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 이 말은 본래 『대학장구(大學章句)』에서 나온 말이다. 원문은 “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 先治其國; 欲治其國者, 先齊其家; 欲齊其家者, 先脩其身; 欲脩其身者, 先正其心; 欲正其心者, 先誠其意; 欲誠其意者, 先致其知; 致知在格物. 物格而后知至, 知至而后意誠, 意誠而后心正, 心正而后身脩, 身脩而后家齊, 家齊而后國治, 國治而后天下平.”

18) 출세(出世)
속세를 벗어난다는 의미.

19) “하늘이 변치 않는 한 도(道) 역시 변하지 않는다.”
한대(漢代)의 유명한 사상가 동중서(董仲舒, BC179~104)의『천인삼책(天人三策)』에 나오는 말로 원문은 “天不變,道亦不變.”이다.

20) 『서유기(西遊記)』
중국 명(明)나라 때 완성된 장편의 구어체 장회소설(章回小說)로서 이른바 중국 사대기서(四大奇書) 중 하나. 내용은 당(唐)나라 태종 때 현장법사(=삼장법사)가 불경을 구하기 위해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과 함께 81난(難)을 극복하고 마침내 경을 가지고 돌아와 이 공로로 부처가 된다는 이야기.

21 ) 『홍루몽(紅樓夢)』
청(淸)나라 건륭(乾隆) 연간에 조설근(曹雪芹)이 지은 장편소설로 원제는 『석두기(石頭記)』이다. 내용은 당시의 인간군상을 치밀하게 묘사하고 개성의 비극과 시대의 오탁(汚濁)을 극명하게 부각시켰다. 청대 최고의 소설로, 92년 정을본이 초간된 이래 100종 이상의 간본과 30종 이상의 속작(續作)이 출간되었으며, 홍학(紅學)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유명하다. 이 소설에 대한 연구는 현대 중국문학계의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로 되었으며 전국민이 애독하는 소설이다.

22) “분분한 세상사 끝이 없어도 천수(天數)는 망망하여 벗어나지 못하네.”
“紛紛世事無窮盡,天數茫茫不可逃.”

23) 『동주열국지(東周列國誌)』
명나라 때 문인 풍몽룡(馮夢龍, 1574~1645)이 지은 춘추 전국 시대를 다룬 역사소설. 흔히 삼국시대를 다룬『삼국지』에 비견된다. 전 12권인 이 소설은 기본적으로 소설의 형식을 지니고 있긴 하나 완전한 픽션이라기 보다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전국책(戰國策)』 『여씨춘추(呂氏春秋)』 등 춘추 전국 시대의 중요 문헌들을 꼼꼼하게 열람한 후 그것을 종합적으로 정리하고 상상력을 동원해 각색한 것이다.

24) 『설악전전(說岳全傳)』
청대(淸代) 전채(錢彩) 지은 소설로 남송시대 유명한 장수인 악비(岳飛, 1103~1142)의 일생을 다루고 있다. 악비는 금나라 군대의 침략에 맞서 의병을 이끌고 큰 공을 세웠으며 이로 인해 젊은 나이에 절도사 및 선무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대금(對金) 항전을 주장하다가, 금과의 화진을 내세운 재상 진회(秦檜)의 모함에 빠져, 누명을 쓰고 처형되었다. 나중에 죄가 없음이 밝혀졌으며 그를 기리는 사당을 만들었다. 중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장수이자 충(忠)의 대명사로 여겨진다.

25) 제갈공명
본명은 제갈량(諸葛亮, AD 181~234)이며, 공명(孔明)은 자이다. 삼국시대 때 촉나라의 승상으로 죽을 때까지 충성을 다 했다.

26) “나라를 위하여 전력을 다 바쳐 죽을 때까지 그치지 않는다”
원문은 “鞠躬盡瘁,死而後已”

27) ‘겉으로 형상은 달라도 안으로 성리(性理)의 동일함을 실증하나니......사람들과 더불어 선(善)으로 돌아가고자 함’
청대에 『도장(道藏)』을 새로 편집하여 중요 부분만 선별하여 만든 『도장집요(道藏輯要)』에서 인용한 글.

28) 평서(評書)
중국 민간 문예의 일종으로, 장편 이야기를 부채 등 소도구를 이용하고 손짓을 해 가면서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하는 것.

29) “생사는 명에 달렸고 부귀는 하늘에 달렸다.”
“死生有命,富貴在天”(『논어』 안연(顔淵) 제13편)

30) 명이하지변(明夷夏之辨)
공자의 말로, 이민족과 중화민족을 분명히 분별해야 한다는 뜻.

31) “무릇 한 정권을 무너뜨리려면 늘 먼저 여론을 조성해야 하며, 늘 먼저 의식형태 방면의 작업을 해야만 한다.”
중국 공산당 제8기 10중전회에서 마오쩌둥의 연설.

32) “나는 승려가 우산을 든 것처럼 법도 없고 하늘도 없다(無法無天)!”
마오쩌둥은 여기서 일종의 언어유희를 하고 있는데 중국어 法(Fa)는 머리털을 의미하는 髮(Fa)와 발음이 같다. 즉, 머리카락이 없는 승려가 우산을 받쳐들면 원래 머리카락이 없으니 머리털이 없고 우산으로 하늘을 가려서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髮를 法로 해석하면 법도 없고 하늘도 없다는 뜻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33) 성탕(成湯)
하(夏)나라의 마지막 왕인 폭군 걸왕(桀王)을 치고 상(商)나라를 세운 임금.

34) 무왕(武王)
상(商)나라 마지막 왕인 폭군 주왕(紂王)을 치고 주(周)나라를 세운 임금.

35) 문천상(文天祥)
문천상(1236~1282)은 중국 남송(南宋) 말기의 정치가이자 시인으로 자는 송서(宋瑞) 또는 이선(履善)이며 호가 문산(文山)이다. 20살 때 진사에 수석 합격했다. 1259년 원(元)나라 군사가 쓰촨성[四川省]에 침입했을 때 천도 문제가 논의되자 상서를 올려 단호히 반대하다 해임되었고 이후 재기용 된 뒤에도 끝까지 항전할 것을 주장했다. 1275년(德祐 1) 원나라 군사가 수도인 임안(臨安)에 육박했을 때, 토호·소수민족으로 이루어진 혼성 의용군을 이끌고 임안 방어에 참가했다. 나중에 송나라가 망한 후에도 끝까지 항전하다가 원나라 군사에게 사로잡혔다. 원 세조(世祖) 쿠빌라이는 그를 이용하여 송나라의 잔당을 소탕하려 했으나, 그는 충절을 굽히지 않고 3년간의 옥고 끝에 살해되었다. 장시(長詩) 『정기가(正氣歌)』는 1281년 옥중에서 지은 것으로, 천지간의 불변의 기(氣)를 송나라에 대한 자신의 충절에 비추어 노래한 것이다. 저서로 『문산전집(文山全集』20권이 있다.

36) “귀한 것은 백성이오, 그 다음이 사직(社稷)이고, 임금은 그 다음이다.”
“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맹자(孟子)』 진심장구하(盡心章句下)]

37) 사생취의(捨生取義)
“生, 亦我所欲也; 義, 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맹자』 고자장구상(告子章句上)]중의 유명한 구절에서 나온 성어로. 생명도 소중하고 의리도 소중하지만 만약 2가지 중에서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면 생명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의리를 택하겠다는 의미이다.

38) “여태껏 무슨 구세주가 없었으며, 또한 신선(神仙)이나 황제(皇帝)에 의지하지도 않는다. 인류의 행복을 창조하려면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 의거해야 한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가의 가사 중 일부.

39) 삼무일종(三武一宗)
멸불정책을 실시한 황제들의 연호에 武가 셋, 宗이 하나 있어서 흔히 삼무일종이라고 하면 멸불정책을 의미한다.

40) 후주(後周)
AD 907-960 사이 중국 오대십국시대에 5대에 속한 왕조의 하나.

41) 백마사(白馬寺)
백마사(白馬寺)는 중국 최초의 불교 사찰로 서기 64년 동한(東漢) 영평永平 8년에 지어졌다.

42) 패엽경(貝葉經)
패엽은 야자나무 과에 속하는 아열대성 식물이다. 이 나무의 잎은 아주 두꺼워서 보관할 때 벌레가 슬지 않고 완전 건조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 고대에 종이가 발명되지 않았을 때 따이족 조상들은 그 잎에 글씨나 글을 써서 기록을 남겼다. 그 잎 위에 새겨진 글과 경문(經文)을 각각 패엽문(貝葉文) 그리고 패엽경(貝葉經)이라고 한다. 따이족은 중국 운남성 일대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으로 불교를 숭상한다.

43) 베이징 이화원(頤和園)
중국 베이징시 서쪽 교외에 있는 공원으로 총면적 2.9㎢에 달한다. 1153년 완안량(完顔亮)이 행궁(行宮)을 설치한 것이 시초이며, 원(元)나라 때 지금의 만수산(萬壽山)과 곤명호(昆明湖)를, 명(明)나라 때 호산원(好山園)을 조성하였다. 청(淸)나라 때인 1764년에 개축, 청의원이라 불리다가 1888년 서태후(西太后)가 다시 개수하고 이화원이라고 개칭하였다. 1924년 공원으로 바뀌었으며 인수전(仁壽殿), 낙수당(樂壽堂) 등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물이 많다. 이 밖에도 고전적인 조경 풍치림의 특성을 풍부하게 살린 화려한 건물·정원·산 등이 조성되어 있어 중국 조경의 극치를 보여주는 곳이다.

44) 누관대(樓觀臺)
누관대(樓觀臺)는 중국의 유명한 도교 사당으로 도가에서는 최초의 축복받은 곳으로 숭배하고 있다. 이 사당은 종남산 북쪽 산허리에 있는데 서안(西安)에서 70km 정도 떨어진 곳이다.

45) 당(唐) 고조(高祖) 이연(李淵)
중국 당(唐)나라를 창건한 초대 황제(618∼626). 본명은 이연(李淵)이며 묘호(廟號)가 고조(高祖)이다. 당태종 이세민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46) 인민공사
1958년에 창설된 중국 농촌의 행정·경제기구. 중국 공산당은 58년 중반 무렵부터 종래의 농업생산협동조합을 합병시키고, 공업·농업·상업·학교·민병의 각 조직을 포함하며, 그때까지 향정부(鄕政府)가 가지고 있던 행정기능까지 갖는, 인구 수만 명에 이르는 하나의 커다란 코뮌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후 마오쩌둥의 지지로 순식간에 중국 농촌 전역으로 확산되었으나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많은 비판을 받았으며 82년 헌법개정을 통해 이전처럼 향정부제도를 부활시키고 인민공사도 해체시켰다.

47)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석가모니부처의 열반을 종교적·철학적으로 깊이 이해하기 위하여 편찬한 불교경전. 이 경은 대승불교의 몇 가지 중요한 사상을 천명한 것으로 내용은, 첫째 불신(佛身)이 상주(常住)한다는 사상과 둘째 열반의 긍정적 가치를 선언하고, 열반에는 상(常)·항(恒)·안(安)·청량(淸凉)·불로(不老)·불사(不死)·무구(無垢)·쾌락(快樂)의 팔미(八味)가 있다는 사상 및 셋째 일체 중생에는 모두 불성이 있다는 사상 등이다.

48) “파계(破戒)한 사람은 천(天)용(龍)귀신(鬼神)이 모두 증오한다. 나쁜 소리[惡聲]가 널리 퍼진다 ...... 죽으면 곧 지은 업(業)에 따라 지옥의 고통을 받게 된다. 액운을 다 겪고 나서야 지옥에서 헤어나올 수 있는데, 그 다음에는 아귀(餓鬼)나 축생(畜生)의 몸을 반복적으로 받게 된다. 마치 끊임없는 윤회속에서 해탈할 시기가 없는 것과 같다.”
『대반열반경』중에서

49) “문서상으로 폭로된 자료만해도, 대륙의 성직자 중 지주, 악질 토호라는 누명을 쓰고 살해당한 사람의 수가 8840명에 달했다. 그리고 노동개조를 당한 사람이 3만9천200명에 달했다. 한편, ‘반혁명’이란 누명을 쓰고 살해당한 사람이 2천450명에 달하였으며 이 죄명으로 노동개조당한 사람도 2만4천800명에 달했다.”
바이즈(百志) 『중국 공산당의 종교탄압 이론과 실천』중에서 인용.

50) ‘미국에 대항하여 북한을 돕는다(抗美援朝)’
직역을 하면 ‘미국에 반대하고 조선(북한)을 원조한다’는 의미로 한국전쟁을 미국의 북한침략으로 단정짓고 북한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중국 공산당 군대가 한국전쟁에 개입하였다.

51)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당신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는 계명 중의 첫째이자 아울러 가장 큰 것이다.”
마태복음 22장.

52)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케사르의 것은 케사르에게”
마태복음 22장

53) 1951년 3.8절
여성의 날

54) “절의 재산을 몰수하고 승려와 비구니더러 마르크스주의를 배우도록 강요하고 강제세뇌를 강화하였으며 승려, 비구니를 노동에 참가하도록 강요하였다. 예를 들어 저장성(浙江省) 닝버(寧波)에는 ‘불교공장’이 하나 있으며, 그곳에서는 2만5000명에 달하는 과거 승려, 비구니들의 노동력을 짜내고 있다. 더욱 황당한 것은 중국 공산당은 스님과 비구니를 결혼하도록 장려하여 불교신앙을 와해하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1951년 3.8절 여성의 날 전에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 부녀연합회는 전 성(省)의 비구니들에게 반드시 며칠 내로 결혼하라고 명령하였다! 그외 젊고 힘센 남자 승려들은 전쟁에 참가할 것을 강요하였고 전쟁터에 보내 총알받이를 만들었다!”
- 바이즈(百志) 『중국 공산당의 종교탄압 이론과 실천』중에서 인용.

55) 장보쥔(章伯鈞)
1895~1969. 중국의 저명한 민주당파 인사로 중국민주연합 창립멤버 중 하나이다. 57년 마오쩌둥에 의해 우파로 분류되어 탄압받았으며 아직까지도 명예가 회복되지 않았다.

56) 소동파
소식(蘇軾 1036~1101)은 중국 북송(北宋) 때 정치가이자 문학가로 자는 자첨(子瞻), 호가 동파거사(東坡居士)이다. 송나라 뿐만 아니라 중국을 대표하는 사대부로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이며, 학자이자 시인이었다. 21세에 문과에 급제했고, 26세 때 제과(制科)에 합격하여 조정에 등용되었다. 그러나 당시 신종황제가 왕안석(王安石) 등을 기용해 재정혁신법을 추진하는 데 반대해 지방관으로 좌천되었다. 호주(湖州)지사로 있던 44세 때, 시문으로 조정을 비방하였다 하여 사형의 위기에 처했으나 황제의 은총으로 죽음을 면하고 황주(黃州)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작품 『적벽부(赤壁賦)』를 써내어 동파거사라는 호를 받았다. 철종황제 때 잠시 복권되어 벼슬이 예부상서까지 이르렀으나 다시 신법이 부활되자 해남도(海南島)로 유배되었다. 이 유배에서 풀려나 귀향 길에 사망했다. 저서로는 『동파칠집』이 있다.

57) 문징명(文徵明)
문징명(1470~1559)은 명대(明代)의 걸출한 화가이자 서예가로 본명은 벽(壁)이고 징명은 자(字)이다. 박학다식하고 총명하며 시, 글, 서예, 그림에 모두 능통하여 당시에 이름을 날렸다.

58) 당백호(唐伯虎)
본명은 당인(唐寅 1470~1523)이며 백호는 자이다. 명나라 성화(成化) 6년 경인(庚寅)년에 태어나서 이름을 인이라고 지었다. 만년에는 불학에 심취하여 호를 육여(六如)거사라고 했다. 젊어서는 벼슬에 뜻을 두었으나 나중에 서화에 관심을 돌렸고 특히 산수화를 잘 그렸다.

59) 왕희지
왕희지(307~365)는 동진(東晉)의 유명한 서예가로 자가 일소(逸少)이다. 명문 출신으로 351년에는 우군장군(右軍將軍)·회계내사(會稽內史)에 임명되어 보통 왕우군(王右軍)이라고 한다. 353년 3월 난정(蘭亭)에서 당시 유명한 시인이었던 사안(謝安)·손작(孫綽) 등과 회합하여 시를 지은 것이 유명하며, 곡수연(曲水宴)으로 후세에 전한다. 서예는 어릴 때부터 잘하였고, 특히 한나라 때 시작된 해서(楷書)·행서(行書)·초서(草書)의 실용서체를 예술적인 서체로까지 완성하였다. 그의 글씨는 살아 있을 때부터 존중받아 남북조시대의 송(宋)·제(齊)·양(梁) 등 각 왕조의 왕후귀족이 애호하였다. 특히 당(唐) 태종(太宗)은 왕희지를 존중하여 그의 글씨를 널리 수집하였다. 오늘날 왕희지의 진필은 전해지지 않지만, 『난정집서(蘭亭集序)』 『십칠첩』 『집왕성교서(集王聖敎序)』 등의 탁본이 전해진다.

60) 오승은(吳承恩)
명(明)대의 문학가로 자는 여중(汝中), 호는 사양산인(射陽山人)이다. 어릴 때부터 글과 그림에 뛰어났다. 1544년 공생(貢生)이 되었지만 관직은 장흥현승(長興縣丞)에 머물러, 주로 글을 지어 생계를 유지하면서 빈곤하게 살았다. 주요 저서에 『서유기』 『사양선생존고(射陽先生存稿)』 등이 있다.

61) 오경재(吳敬梓)
오경재(1701~1754)는 청(淸)대의 문인으로 자는 민헌(敏軒)·문목(文木)이다. 명문 출신으로 글재주가 있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 빈궁한 생활 속에서 창작을 시작하여 사회의 기층의 다양한 신분과 성격의 인물들을 묘사하였으며, 특히 상층 문인들을 날카롭게 비판하여 독자들의 공감을 얻었다. 저서에는『유림외사(儒林外史)』 이외에 시문집 『문목산방집(文木山房集)』 『금릉경물도시(金陵景物圖詩)』 등이 있다.

62) 청진사(淸眞寺)
회교 즉, 이슬람교 사원을 뜻한다.

63) “불경은 무슨 불경인가? 모두 개소리이다.”
원문은 “甚麼佛經盡放狗屁”

64) 『홍기(紅旗)』 잡지에서 『공구 그 사람(孔丘其人) 』
구(丘)는 공자의 이름으로 중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던 스승인 공자를 폄하한 글.

65) 병음화 정책
전통 한자(=繁體)가 배우기 어렵고 쓰기에 불편하다는 이유로 간단하게 변경한 간체자를 보급하고 더 나아가 한자 발음을 알파벳을 이용한 병음으로 바꾼 정책. 원래 공산당은 장기적으로 아예 한자를 없애버리고 병음만으로 문자를 대신하려 했으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오직 중국 공산당만이 간체자를 사용하고 있으며 그 외 한국, 일본 등 다른 모든 한자 문화권에서는 번체자를 사용한다.

66) 우쉰(武訓)
우쉰(1838~1896)은 원래 집안이 가난하여 구걸을 해서 모친을 봉양하여 효자 거지로 알려졌다. 나중에 어머니가 사망한 후에는 구걸한 돈으로 무료 학교를 운영하였다.

67) 상방(上訪)
중국의 전통적인 청원방법으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민원인이 해당 기관에서 민원을 받아주지 않을 경우 상급기관에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말한다.

68) 610사무실
중국의 전 독재자 장쩌민의 지시하에 파룬궁을 탄압하기 위해 설립된 전문조직. 나치의 게쉬타포와 같은 일종의 초법적인 비밀조직이다.

69) “8억이나 되는데 싸우지 않고 되겠는가?”
마오쩌둥이 중국 인민을 다스리려면 반드시 투쟁이 필요함을 강조한 말.

70) “때려 죽이면 그만이다”
중국의 전(前) 독재자 장쩌민이 파룬궁을 탄압할 때 수련생을 죽여도 관계자를 책임추궁하지 않겠다는 의도에서 한 말.

71) “원수를 깨물고 한(恨)을 깨물고 원한을 씹어서 억지로 삼키면 원한은 마음속에 들어가 싹을 틔운다.”
문화대혁명 당시 유행했던 중국 가극에 나오는 노래 가사.

72) 홍안병(紅眼病)
'Red Eye Syndrome'이라고도 하는데 남이 자신보다 출세하거나 수입이 많은 것을 보고 부러워하면서 셈을 내는 병적인 심리를 의미.

73) ‘자기가 하기 싫은 것은 남에게 시킨다.’
원문은 “己所不欲,要施於人”으로 이 말은 원래 공자가 『논어』에서 한 “자신이 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는 구절을 패러디 한 것이다.

74) 모범극
문화대혁명 기간 중에 성행한 일종의 가극.

75) 어록가(語錄歌)
마오쩌둥의 어록으로 만든 노래.

76) 『지도전(地道戰)』
항일전쟁시기를 배경으로 중국 인민들이 일본 침략자들에 맞서 땅굴을 이용해 용감히 싸운 것을 표현한 영화로 1965년 작품.

77) 『지뢰전(地雷戰)』
1940년대를 배경으로 허베이성의 홍군 전사들이 일본군에 맞서 사제 폭탄을 만들어 싸운 이야기를 표현한 영화.

78) “군주는 가볍고 백성이 귀하며 사직이 중요하다”
원문은 “君輕民貴,社稷為重.”

79) 3년 대기근
1959~61년까지 중국 대륙에서 천8백만에서 4천3백만명으로 추정되는 사망자가 발생한 역사상 가장 큰 기근. 사실은 중국 공산당이 무모하게 추진한 대약진 운동의 결과임에도 공산당은 이것을 자연재해 탓으로만 돌렸다. 실제 조사한 바에 의하면 당시에 자연재해는 존재하지 않았다.

80) 사람의 천성은 조용하여 외물을 감지한 후에야 사람의 정감(情感)에 영향을 주며 아울러 자신의 심지(心智)에 따라 좋아하고 싫어하는 정(情)이 생긴다. 만약 제약하지 않는다면 사람은 무궁무진한 외부 유혹과 내심의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에 동화하여 수많은 나쁜 일을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선왕(先王)은 예악(禮樂)을 만들어 사람을 제약하였다
“人的天性是好靜的,感知外物以後就會影響人的情感,並按照自己的心智產生好惡之情,如果不加以節制的話,人就會被無窮無盡的外部誘惑和內心好惡同化而做出許多壞事,所以先王制做禮樂來節制人.”

81) “즐겁되 음란하지 않으며 슬프되 상심하지 않는다.”
“樂而不淫, 哀而不傷”(『논어』 팔일(八佾) 제삼)

82) 『시경(詩經)』
중국 최고(最古)의 시집. 황하(黃河) 유역의 여러 나라와 왕궁에서 부른 시가(詩歌) 305수(首)를 수록한 것이며, 서경(書經)·역경(易經)·춘추(春秋)·예기(禮記)와 함께 오경(五經) 중 하나이다. 서주(西周) 초기(BC 11세기)에서 동주(東周) 중기(BC 6세기)에 이르는 약 500년간의 작품들로 이루어져 있다.

83) “『시경(詩經)』에 나오는 삼백편의 시를 한마디로 하자면 생각에 삿됨이 없는 것이다.”
“詩三百,一言以蔽之,曰思無邪.”(『논어』 위정(爲政) 제이)

84) “군자는 재물을 아끼지만 도(道)에 맞게 얻는다.”
“君子愛財,取之有道.”

85) 도연명(陶淵明)
동진(東晉)·송(宋)나라 시대의 시인. 이름은 잠(潛)이고, 연명은 자(字)이다. 호(號)는 오류선생(五柳先生). 하급귀족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젊어서부터 면학에 힘쓰며 입신의 뜻을 품었으나 13년 만에 관직에 종지부를 찍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당시에 전원으로 돌아가는 심경을 토로한 것이 그 유명한『귀거래사(歸去來辭)』이다. 이후 63세로 죽을 때까지 주로 심양 근처에서 지내면서 은사로 처세하여 명성을 얻었다. 그가 지은 시는 오늘날, 사언시(四言詩) 9수, 오언시 120여 수가 전해지고 있다. 내용은 전원에서의 은사의 생활을 노래한 것, 유유자적한 심경을 토로한 것, 주·현의 관리들과 주고받은 시, 영사(詠史), 의고시(擬古詩) 등이 주이다. 그는 은사의 처세를 뛰어난 감각으로 노래한 최초의 시인이었다. 당(唐)나라 때에 왕유(王維)·맹호연(孟浩然)·위응물(韋應物)·유종원(柳宗元) 등 자연파시인들의 찬탄을 받았고, 송나라 소동파에 이르러서는, 육조제일(六朝第一)일 뿐 아니라 고금독보(古今獨步)의 시인이란 명성을 얻었다.

86) “동쪽 담 아래에서 국화를 따서 멀찍이 떨어진 남산을 바라보네”
“採菊東籬下,悠然見南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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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평 공산당’은 중국공산당의 본질을 9가지로 나눠 평론한 대기원시보의 사설입니다. 대기원시보는 인성, 인권, 자유를 지향하는 국제적인 신문그룹으로서(31개국 41개 가맹사), 동양의 정통정신문화를 발양하여 서구물질문명의 폐해와 반인류적인 인권문제를 개선하고 도덕성을 회복하는 데 힘쓰고 있습니다. 대기원시보는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인류문명을 선도해 온 찬란한 정신문화를 핍박하고 그 정통성을 멸절하려는 중국공산당의 본질과 지난 80여 년간 주기적으로 자행한 인권말살의 실상을 폭로하고자 합니다. 이는 인류의 안녕을 위협하는 삿된 독소를 제거하고 문화적인 대안을 모색하는 대기원시보의 기본활동입니다.

중국부  china@epoch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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