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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회] 서한을 중흥시킨 선제(宣帝)-10

▲ 소제와 선제가 통치했던 시기는 한나라 400년을 통틀어 가장 편안하고 살기 좋은 시기였다. 신상필벌(信賞必罰)이 분명해 관리들의 기강이 바로 섰으며, 백성을 소중히 여기고 생산을 장려해 백성은 생기가 넘치고 번영했다. 정치는 투명했고 경제도 안정되었으며 대외관계도 무제시기의 강성함을 이어 아주 공고했다. 자주 침입을 해 오던 흉노족마저 선우가 직접 번신을 청해왔다. 후세 사람들은 이 시기를 소선 중흥이라 불렀다. (한선제상<삼재도회(三材圖會) 명 만력(萬曆)연간 간행본>)

 

 

곽광에 대한 역사적 평가

 

‘한서’의 저자 반고는 곽광의 열전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곽광은 젊어서부터 무제(武帝)를 모셨으며 궁정에서 발탁되었다. 뜻이 굳고 의로워 황제의 인정을 받았으며 어린 소제(昭帝)를 보필해 한나라 황실을 보전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이때부터 조정을 주도해 어린 군주를 옹립했으며 연왕(燕王)의 반란을 꺾고 상관걸 부자를 제거했다. 권력을 이용해 정적을 제압함으로써 충성심을 완수했다. 창읍왕(昌邑王)을 폐위시키고 선제(宣帝)를 옹립하는 위기에서도 큰 절개를 내세워 굽히지 않았으니 마침내 나라를 바로잡고 사직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그러니 주공과 이윤이라 할지언정 어찌 그보다 더하겠는가! 그러나 곽광은 배운 학문이 없어 큰 이치에 어두웠기 때문에 음험한 아내의 사악한 꾀를 따라 딸을 황후로 세웠다. 넘쳐흐르는 탐욕에서 벗어나지 못해 장차 전복될 화(禍)를 더했으며 그가 죽은 지 3년 만에 종족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

 

한편 ‘자치통감’을 지은 사마광은 곽광의 잘못은 분명히 인정해야 하지만 그 전에 선제가 곽광의 자손들을 부귀하게 만들어 틈이 벌어지게 했으니 곽 씨 집안의 재앙은 선제가 자초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또 곽광의 자손을 한 명도 남기지 않아 제사조차 지낼 수 없게 한 것은 곽광에 대한 선제의 은혜가 각박한 것이라고 평했다. 즉, 미리 곽 씨 일족을 견제해 스스로 방종하게 하지 말았어야 했고 설사 반란을 일으켰을 지라도 제사 지낼 후손 하나 정도는 남겼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선제에 대한 평가

 

반고는 한나라를 중흥시킨 선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효선제(孝宣帝)의 정치는 신상필벌(信賞必罰)이 분명했고 명분과 실제를 종합해 핵심을 짚었다. 관리들이 그 직책에 걸맞게 하는 것을 충분히 파악해 백성들이 각자의 직업에서 편안했다. 흉노의 혼란에 대해서는 망하는 자를 밀어내고 존재할 사람을 굳건히 해 북쪽 이적들에게 위엄을 펼쳐보였다. 때문에 선우가 스스로 머리를 숙이고 번신(藩臣)을 칭하게 한 것이다. 선제의 공로는 조종(朝宗)을 빛냈고 업적은 후대에 이어졌다. 왕조를 중흥(中興)했으니 은(殷)나라의 고종(高宗)이나 주(周)나라의 선왕(宣王)에 비교할 만하다.”

 

한마디로 말해 선제 정치의 핵심은 적재적소에 훌륭한 인재를 선발해 임무를 맡기되 잘하면 반드시 상을 주고 못하면 분명하게 벌을 가한 것이다. 선제가 조정에 공을 세운 신하들을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 보여주는 예가 있다.

 

한나라가 창업된 이래 최대의 골칫거리인 흉노 문제를 해결한 후 선제는 자신을 도와준 신하들의 미덕(美德)을 생각하며 그들의 공을 영원히 기리고자 했다. 이에 기린각(麒麟閣)에 공신들의 용모를 본떠 그림을 그리고 관작과 성명을 써넣었다. 여기에 선발된 인물은 곽광, 장안세, 한증(韓增), 조충국, 위상, 병길, 두연년, 유덕(劉德), 양구하(梁丘賀), 소망지, 소무(蘇武) 등 모두 11명이었다.

 

이들이 모두 공덕이 있고 당대에 이름을 날렸을 뿐만 아니라 선제의 중흥을 보좌했음을 분명히 밝히고 후손들에게 알리고자 한 것이다. 이중 곽광만은 존경하는 의미에서 특별히 이름을 쓰지 않고 ‘대사마?대장군, 박육후(博陸侯)이며 성은 곽(?)씨이다’라고만 밝혔다.

 

한편 사마광은 선제의 업적이 뛰어난 것은 인정할 수 있지만 지나치게 엄격한 법적용으로 뛰어난 인재들을 희생시킨 것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보았다. 가령 탁월한 능력으로 백성들을 잘 다스렸던 조광한(趙廣漢)과 한연수(韓延壽) 및 강직한 성품으로 황제에게 직언한 개관요(蓋寬饒)와 양운(楊?)을 죽인 것은 선제의 과오라는 지적이다.

 

쨌든 한무제의 뒤를 이어 소제와 선제가 통치한 기원전 86년부터 기원전 49년까지 한나라의 정치는 투명했고 경제도 안정되었으며 대외관계도 무제시기의 강성함을 이어 아주 공고했다. 때문에 역사에서는 이 시기를 소선중흥(昭宣中興)이라 한다. 두 황제는 백성들의 재산을 소중히 여기고 생산을 장려했기 때문에 사회는 생기가 흘러넘쳤으며 번영을 구가했다.

 

일반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한 왕조 4백년을 통틀어 가장 살기 좋은 시대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한편, 대장군 곽광은 소제 통치 전 시기와 선제 등극 초기 약 20년간에 걸쳐 실질적인 정령(政令)을 행사하며 두 황제를 도왔고 선제가 자립할 수 있는 터전을 닦아놓았다.

 

특히 당시 한나라의 수도였던 장안(長安)은 중국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유명한 정치, 경제 및 문화의 중심지였다. 나라에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 태학(太學 국립대학)에는 박사와 제자들을 초빙했고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학자들이 끊이지 않고 몰려들었다. 당시 장안의 규모는 성곽 둘레가 25Km에 달하고 인구가 40-50만에 육박해 로마의 4배에 달했다.

글/ 하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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